주간동아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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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만 요란한 빈수레 될라

‘외자유치’ 성패가 곧 특구의 미래… “이익 낼 수 있는 곳” 확실한 개혁·개방 추진해야

  • 박정동/ KDI 연구위원 jdpark@kdiux.kdi.re.kr

    입력2002-10-02 1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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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만 요란한 빈수레 될라
    북한은 9월26일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을 공표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정치적으로는 입법·사법·행정권을 보장하고, 법률제도도 50년간 변화시키지 않으며 독자적인 여권 발급과 구기(區旗) 제정도 허용한다. 경제적으로는 특별행정구에 독자적인 토지개발 비용 관리권을 부여하고, 토지 임대기간도 2052년 12월31일까지로 정함으로써 경제활동의 안정성을 부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특별행정구를 국제적인 금융·무역·상업·공업·첨단과학·오락·관광지구로 꾸미기로 정하고, 국가가 ‘투자자들의 투자를 장려하여 기업에 유리한 투자환경과 경제활동 조건을 보장’하도록 했다.

    나아가 북한은 신의주 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에 중국 2대 부호인 양빈(楊斌) 어우야[歐亞]그룹 회장을 임명하고, 검찰·사법제도를 관장할 특구 초대 법무국 수장에는 유럽인을 임용해 유럽식 사법제도를 적용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입법회원도 15명 중 절반 이상을 외국인으로 임명할 계획이다.

    경제제도 역시 자본주의 제도에 의거해 신의주 특별행정구에서는 홍콩과 같이 토지사유화를 허용하고, 외국인들의 기업 설립도 규제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특별행정구 내 통용 화폐로 달러화를 채택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웃나라 중국이 1978년 말부터 덩샤오핑[鄧小平]의 지휘 아래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빗장을 풀지 않았던 북한의 시나리오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의 파격적인 내용이다. 특히 초대 행정장관에 외국인을 임명한 것은 한국이나 일본에서조차도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조치라 여겨진다.

    돌이켜보면 북한은 84년 9월에 이미 합영법을 제정하고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1년 12월에는 함경북도의 나진·선봉지구에 신의주 특별행정구와 유사한 자유경제무역지대도 설치했다. 하지만 그동안 투자유치 실적은 극히 저조했다.



    반면 중국은 같은 기간 괄목할 만한 외자유치에 성공,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는 데 성공했다.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이고, 더군다나 사회주의 국가라는 유사점이 있음에도 두 나라의 외자유치 실적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정·군의 개혁·개방 의지와 노선의 갈등

    중국의 경제특구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중국 공산당과 국무원, 인민해방군의 일치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북한의 경우 당·정·군 사이에 정책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당과 군의 입장이 선명하지 못했다. 이는 중국의 경제특구 정책이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기관인 중국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결정된 사항인 데 반해, 북한의 개방 정책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자유경제무역지대 설치가 북한의 최고 권력기관인 노동당이 아닌 한국의 내각에 해당하는 정무원에서 결정된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정무원 결정 제74호, 1991년 12월 28일)

    따라서 노동당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는 상황에서의 경제특구 건설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외부 투자가들 역시 북한의 개방 정책에 의구심을 갖게 됐다. 반면 ‘全國支援特區, 特區服務全國(전국은 특구를 지원하고, 특구는 전국을 위해 봉사한다)’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은특구 지원을 위해 중앙에서부터 독려했다.

    개혁과 개방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분리돼 실시할 수 없다. 중국의 경우 경제특구 정책을 실시하면서 개혁 정책도 동시에 실시했다. 즉,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 선언과 동시에 농업 개혁, 기업 개혁, 가격 개혁, 재정 개혁, 금융 개혁, 무역·직접투자 개혁, 유통 개혁 등 전 분야에 걸친 경제체제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과 개방이 한 틀이 되어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소리만 요란한 빈수레 될라

    중국의 경제특구 정책은 공산당 차원에서 결정됐으나 북한의 경우는 노동당의 지지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했다. 사진은 나진·선봉(위쪽)과 중국 심천 시내

    북한의 경우는 어떤가. 세금 감면과 저렴한 노동력만 공급하면 외자유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외자유치는 원하면서도 경제 개혁으로 분류될 수 있는 정책 실시에는 대단히 소극적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기업활동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경제특구 하나만 보더라도 북한은 746km2에 해당하는 신의주특구를 철조망으로 가로막아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조치만 단행했다. 과거 나진·선봉의 경우를 보더라도 특구 내에서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소유제와 경제관리 시스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안이 제시되지 않았었다. 외부 투자가들에게 좀더 확실한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특구 내 부동산 시장, 소비재 시장, 생산재 시장, 자본 시장, 노동력 시장의 형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아울러 토지, 건물 등의 소유 형태에 대해서도 명확한 규정을 밝혀야만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히 한 것이다.

    정치·외교적 안정도

    외국자본을 유치하는 데 있어서 정치·외교적 안정은 매우 중요하다. 중국은 이 점에서 보기 드물게 성공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즉, 덩샤오핑 지도하에서 중국 정치·외교의 핵심은 유화적인 대외관계 구축을 기조로 한 평화로운 국제환경 확보였다. 다시 말해, 중국은 가난한 개발도상국이므로 군비에 국력을 쏟아부어서는 경제건설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공산당 지도부의 공통된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건설 우선이라는 공산당 지도부의 인식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금까지 미국 일본 등 주변국은 중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78년 미·중 국교 정상화 이후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국부와 국력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지원과 기술적 조언을 받아왔다. 일본 역시 대(對)중국 최대 경제원조국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중국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북한의 경우는 달랐다. 물론 북한 역시 대외 경제 관계를 정립하는 데 자주·평화·친선 개념을 강조하기는 했다. 정치적인 구호뿐 아니라 실제로도 북한은 외국자본 유치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95년 8월부터 로스앤젤레스, 뉴욕, 도쿄, 베이징, 홍콩, 유럽 등지에서 북한이 행한 일련의 투자유치 활동 등이 그 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정치공세를 계속했다는 점이다.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 “정전협정 파기” “보복은 백배 천배가 될 것이며 발포에는 발포로 응수할 것” “북한 인민군은 가까운 시일 안에 보복할 것” 등 그동안의 대남 발언이 그러한 예다. 정치·경제적인 안정을 투자 요건의 제1항목으로 인식하고 있는 기업인들로서는 이러한 정치·사회적 불안을 결코 소홀히 넘길 수 없었다. “북한 이외에도 투자 여건이 좋은 곳은 얼마든지 있다. 구태여 정국이 불안한 북한에 투자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 투자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점이 바로 북한이 중국보다 투자유치 업종의 범위나 기업소득세 법규상(유통·금융·통신 분야 개방은 중국의 경우에도 최근까지 엄격히 제한해오던 분야다. 그리고 자유경제무역지대에서의 기업소득세를 14%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15%보다 유리하다) 유리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저조한 외자유치 실적을 기록한 이유였다.

    그러면 새로이 시작하는 신의주 특별행정구의 미래는 어떨까. 열쇠는 앞에서 언급한 외자유치를 위한 장애요인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즉 당·정·군의 일치된 개혁·개방 의지의 표명, 개방과 아울러 적극적인 개혁 정책의 실시, 정치·외교적인 안정 추구 등을 통해 얼마나 빨리, 그리고 확고하게 투자자들에게 대북 투자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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