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4

2002.10.10

北 파격행보 시나리오 있다

신의주 특구·고이즈미 방북 등 지도부가 주도… 체제유지·경제수혈 두 마리 토끼 잡기(?)

  • 송문홍 / 동아일보 논설위원 songmh@donga.com

    입력2002-10-02 16: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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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부터 시작된 일련의 경제관리시스템 개선작업과 최근 신의주 특구 발표 등으로 볼 때 북한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그런데 그 ‘돌아올 수 없는 다리’에 대한 시각 차가 크다.

    한국과 미국 등 서방세계는 북한의 최근 조치들이 지금 당장 자본주의를 전면 도입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시행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시간이 갈수록 ‘사회주의 북한’의 붕괴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북한 지도부는 북한 체제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런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신의주 특구 같은 과감한 시도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동유럽의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듯 개혁·개방은 체제 이완을 초래할 위험이 있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만명 내지 300만명에 달하는 북한 내 핵심계층(노동당원)이 다 함께 변화하면 그 같은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위아래가 하나가 되어’ 외부의 도전에 대처해 나가겠다는 구상이다.”

    최근 평양을 방문하고 서울에 온 재미교포 출신 대북사업가의 말이다. 작년 초에 있은 중국 방문 이래로 김정일 위원장이 경제일꾼들에게 강조해온 ‘신사고’가 단순히 경제난 극복을 위한 처방이 아니라 더 큰 차원에서 국가경영 전략과 맥이 닿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는 평양 분위기가 전에 없이 활기에 넘치고 있다고 전했다. 통일교측이 운영하는 보통강호텔 종업원들이 어느새 자본주의 방식을 배워 사용자측과 임금협상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북한을 둘러싼 한반도 주변정세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6월 말 서해교전 사태에 대한 유감 표명에서부터 7월 경제관리시스템 개선조치, 남북관계의 전면 복원 및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방북, 그리고 최근 신의주 특별행정구 발표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굵직굵직한 일들이 모두 북한 지도부가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점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최근 상황은 북한이 주변 여건에 떠밀려가는 형국이 아니라 북한이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지난 1년을 ‘허송세월’하다가 남쪽에서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되는 시점에 돌연 전방위 공세로 나오는 배경은 무엇일까. 이 같은 김위원장의 ‘도박’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서해교전은 치밀하게 계산해 일으킨 사건”

    7월 북한의 경제관리 개선 조치가 나온 이후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서해교전 사태를 도발한 배경’에 대해 새삼 의문을 가졌다. 북한의 행보에 대한 해석 작업이 한결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가격체계 및 임금, 환율 등을 대폭 현실화한 북한의 조치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일단은 상점 진열대 위에 물건이 놓여 있어야 10배, 20배 오른 값에라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북한은 서해도발에 대해 비교적 신속하게 유감을 표명하고 중단됐던 남북관계를 전면 재가동시켰다. 이는 단기적으로 남측으로부터의 경제지원을 기대한 행동으로, 북한은 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2차 회의를 통해 쌀 40만t을 지원받는 등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한편 일본 총리의 방북 때 김위원장이 납치자 문제에 대해 직접 사과하는 ‘파격’을 통해 북-일 수교협상을 재개하기로 한 것 역시 중장기적 차원에서 일본으로부터의 경제적 수혈을 겨냥한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서해교전을 일으킨 ‘의도’는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월드컵 막바지인 6월 말이라는 시점에 발생한 이 사건은 북한 당국이 그 직후 발표한 일련의 경제조치를 생각하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저런 해석이 분분했다. 상부의 재가를 받지 않은 북한 해군의 돌발적인 행동이라는 해석, 내부 결속용임을 강조하는 입장, 북-미 대화를 앞둔 사전포석용이라는 풀이 등등.하지만 어느 것 하나 논리적인 완결성을 갖지 못했다. 이와 관련, 한 재미교포의 설명은 흥미롭다.

    “서해교전은 군부가 우발적, 독자적으로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 북한 지도부의 치밀한 계산하에 나온 사건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시점에서 이 사건을 다시 바라보면, 북한은 이 사건으로 인해 어떤 직·간접적인 피해도 입지 않았다는 점이 확실한 근거가 된다. 북한은 오히려 내부적으로 북한 해군의 승리라는 선전효과를 거뒀고,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군사문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켰다. 이 일로 인해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남쪽에서 원치 않을 것이라는 계산, 따라서 남북관계도 필요할 때 유감 표명 정도로 복원시킬 수 있다는 구상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최근의 남북한과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삼각 관계를 볼 때 이 같은 분석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즉 작년 이래 크게 벌어져 있는 한미관계의 틈새를 북한이 교묘하게 활용한 결과가 서해교전이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최근 몇 달간의 북한의 행보는 치밀하게 조율된 것이라는 결론은 여러 면에서 설득력 있어 보인다.

    북한의 최근 도박수 중 하이라이트는 역시 신의주 특구 지정. 자국 영토를 외국에 내주는 ‘조차(租借)’ 수준에 버금가는 급진적인 특구안(案)도 놀라운 내용이었지만, 그 책임자에 양빈(楊斌)이라는 ‘인물’을 데려다 앉힌 것은 더욱 놀라운 도박이었다. 그러나 중국 사정에 정통한 한 대북사업가는 이 역시 ‘오래 전부터 구상됐던 계획’이라고 설명한다.

    “신의주 특구 계획은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 시절부터 염두에 두었던 구상이다. 김위원장은 중국의 중공업이 몰려 있는 발해만 지역의 돈을 끌어들이는 금융중심지, 물류중심지이자 카지노 등을 갖춘 종합레저타운으로서의 신의주 특구를 구상했고, 강력한 사업 추진력을 가진 양빈을 그 첫단추를 꿸 적임자로 선정한 것이다.”

    김위원장은 양빈 장관이 불투명한 이력과 검증되지 않은 행정능력으로 취임 초기부터 적지 않은 소동을 불러일으키리라는 점까지 일찌감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북미 관계 개선 여부 따라 ‘대박’ 아니면 ‘쪽박’ 판가름

    앞으로 두고 봐야 할 대목은 김위원장의 이 같은 도박이 과연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지, 궁극적으로 성공할 것인지 여부다. 먼저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10월3일 제임스 켈리 미 특사의 방북으로 열리는 북미 대화가 관건이다. 북한으로서는 그동안 대외정책의 ABC를 북미관계 개선에 두고 있었고, 최근 대내외적으로 벌인 일련의 조치들도 결국 북미관계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 승부수’는 아직 남아 있는 셈이다.

    한편 남쪽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김위원장의 답방이 연내에 이뤄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안 온다’는 의견이 아무래도 우세하다. 무엇보다 김위원장이 남쪽에 내놓을 선물도 마땅치 않은데다 남쪽에서 얻을 수 있는 ‘성과’, 예컨대 ‘좀더 진전된 형태의 통일방안 구상’ 등이 불투명하고, 이 같은 협상은 새 정부와 갖는 게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하리라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햇볕정책의 공과를 정당하게 평가받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 ‘속도 조절’에 신경을 써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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