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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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도전자 아름다운 패배

  • < 김시무/ 영화평론가 > kimseemoo@hanmail.net

    입력2004-10-18 16: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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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도전자 아름다운 패배
    ‘챔피언’은 곽경택 감독의 진정한 야심작이다. 전작인 ‘친구’가 거둔 전대미문의 흥행성공이 주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기 때문이다.

    ‘챔피언’은 ‘친구’처럼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무척 다르다. ‘친구’의 경우 현실에서는 별볼일 없는 한 조폭 멤버에 불과했던 인물이 낭만적인 영웅으로 미화되어 재탄생했다면, ‘챔피언’에서는 승승장구하던 한 유망한 권투선수의 결코 화려하지 못했던 삶의 이면이 매우 평범하게 재현되고 있다. 말하자면, ‘챔피언’이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영원한 도전자였던 김득구의 권투인생을 담담한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챔피언’에는 드라마틱한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권투선수인 세계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를 극화한 미국 영화 ‘알리’와 비교해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알리의 권투인생은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챔피언이 되었다가 병역 거부로 선수권을 박탈당하고, 재도전하여 마침내 정상의 자리에 복귀했던 알리의 실화야말로 신이 쓴 인생 드라마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영원한 도전자 아름다운 패배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김득구의 실화에는 이렇다 할 극적인 요소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패배를 기록했던 마지막 경기에서 사망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김득구의 삶과 죽음은 더 이상 평범한 것일 수가 없다. 아니, 사각의 정글에서 인생을 마침으로써 더 이상 경기를 이어갈 수 없었던 김득구의 인생역정이야말로 영원한 도전자의 표상 그 자체였다. 그의 통산 전적은 19전 17승1무1패였다.

    소설이론가 루카치의 표현을 빌리면, 김득구는 완결된 삶의 형식을 위해 인생의 내용을 포기한 경우가 된다. 이를 우리 식으로 거칠게 표현한다면 ‘가늘고 길게 살기보다는 굵고 짧게 산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물론 이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운명적이라는 점에서 강렬한 정서적 반응을 야기한다. 영화적 허구가 아니라 실화이기 때문에 더욱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의 관심사는 실존인물 김득구의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김득구의 모습이다. 유오성이라는 개성파 배우에 의해 되살아난 김득구의 모습에 과연 관객들이 공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김득구의 완결된 삶의 형식을 영화화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친구’의 흥행감독 곽경택이었고, ‘친구’에서 열연하여 강인한 인상을 남겼던 유오성이 주인공을 맡았기에 이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영화적 진정성이라는 평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관객들이 ‘챔피언’에 공감할 여지는 많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유보 조항이 붙는다. ‘친구’의 연장선상에서 ‘챔피언’을 보려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감독이고 같은 주인공이지만, 앞서 언급했듯 그 접근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친구’가 장르영화 규칙에 충실한 누아르풍의 영웅담인 반면, ‘챔피언’은 오히려 영웅담에서 탈피하려는 흔치 않은 시도를 보여준다.

    영원한 도전자 아름다운 패배
    다른 비교를 더 해보자. ‘친구’의 경우 영화적 리얼리티(현실감)를 충분히 확보한 상태에서 영화적 팬터지(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를 극대화했다. 그러나 ‘챔피언’은 최소한의 영화적 팬터지를 토대로 하여 영화 외적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고 있다. 조폭을 미화했다는 ‘친구’에게 덧씌워진 오점을 ‘챔피언’이 말끔하게 씻어주었다고 할까.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면 곽경택 감독은 권투시합 같은 본격적 액션신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경기장면을 애써 외면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절제했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스쳐 지나가듯 보여지는 시합 장면은 무척이나 리얼하다. 박진감이 넘친다고 할까. 특히 도전자 김득구와 챔피언 맨시니의 일전이 펼쳐지는 야외 경기장의 재현은 이제껏 한국영화의 고질적 문제였던 군중 장면의 부자연스러움을 일거에 날려버릴 정도로 탁월하다. 이미 ‘유령’ ‘반칙왕’ 등에서 역동적인 촬영감각을 보여주었던 홍경표 촬영감독의 공으로 돌려져야 할 대목이다. 유오성이 구애를 위해 달리는 버스를 따라잡는 장면에서 삽입된 ‘로봇 태권 V’의 주제가도 인상적이다.

    곽경택 감독은 액션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자잘한 일상에 더 많은 애정을 부여함으로써 영화 ‘챔피언’이 단순한 복싱영화로 분류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챔피언’은 알리 같은 영원한 챔피언의 화려한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김득구라는 영원한 도전자의 아름다운 패배, 그리하여 더욱 비극적으로 완결된 좌절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영화 ‘챔피언’으로 인해 김득구는 불꽃처럼 살다 간 아름다운 청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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