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4

2002.03.07

너 들었니? 수염 뽑는 남자들이 있대!

부드러운 피부·깔끔한 인상 위해 피부과·성형외과 찾는 발길 늘어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입력2004-10-18 16:3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너 들었니? 수염 뽑는 남자들이 있대!
    매일 아침 7시면 집을 나서야 하는 회사원 정모씨. 자명종 소리를 무시하고 이불 속에서 ‘5분만 더…’ 하며 잠깐 게으름 피우다간 출근 준비에 허둥대기 일쑤다. 아침을 거를지언정 결코 거를 수 없는 일과가 있으니 바로 면도. 반쯤 졸면서 면도를 하다 보면 곧잘 얼굴을 베고, 하루라도 거르고 나간 날은 ‘지저분해 못 봐주겠다’며 주변에서 난리가 난다. 특히 요즘 같은 환절기엔 면도 후 얼굴이 땅기는 것은 물론, 하얗게 각질까지 일어나고 군데군데 빨간 뾰루지까지 생겨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이럴 땐 정말 남자로 태어난 것이 싫어질 지경.

    400여년 전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수염이 있는 남자는 청년 이상, 수염이 없는 남자는 인간 이하다”며 수염예찬론을 펼쳤고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는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자신의 수염을 다치지 말게 하라며 사형 집행관을 꾸짖었다지만, 남자의 수염이 남성미와 권위의 상징이라는 건 이제 옛말일 뿐이다. 수염을 기르고 나서 오히려 인기를 얻고 있는 미국의 앨 고어 전 부통령과 가끔씩 수염을 기르고 나타나는 할리우드 스타들에게는 수염이 또 다른 ‘옷’이자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매일같이 수염을 밀고 깎아내야 하는 보통 남자들에게 수염은 ‘있으나마나’한, 아니 ‘없으면 더 좋을’ 그 무엇이 아닐지.

    너 들었니? 수염 뽑는 남자들이 있대!
    박&박 피부과 박세훈 원장은 3, 4년 전부터 병원을 찾아와 ‘수염을 뽑아달라’고 주문하는 남자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한다. “남자의 상징이라는 수염을 없앤다는 게 의사인 저로서도 거부감이 있었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라고 하면 ‘상징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영구히 안 나게 해달라’는 거예요. 수술 후 다른 어떤 수술의 경우보다 환자 만족도가 높은 것을 보면서 저 역시 남자에게 수염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보통 피부과에서 시행하고 있는 레이저 제모술은 원래 여성들의 겨드랑이 털이나 다리 털을 제거하는 데 쓰이는 치료술. 그러나 최근엔 남성들이 주요 고객으로 떠올랐다. 이 수술은 수염이 아예 자라지 않도록 모낭 자체를 없애는 것으로 수염이 많든 적든 상관없고, 콧수염 턱수염 구레나룻 등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시행할 수도 있다. 박원장은 요즘 한 달에 평균 열 명의 남성들에게 이 수술을 시행하고 있다.

    너 들었니? 수염 뽑는 남자들이 있대!
    4회에 걸쳐 턱수염 제모 수술을 받은 허욱씨(37)는 영업직 종사자로 오랫동안 모낭염으로 고생하다 제모수술을 결심했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이라 깔끔한 인상이 중요하거든요. 영원히 수염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 좀 망설였지만 늙어서도 수염은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침마다 면도할까 말까 고민할 필요도 없고, 주위에서 깨끗해졌다는 말을 들으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내친김에 피부 박피술까지 받아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만들기에 나섰다. 일주일에 한 번은 남성 전용 피부관리센터에서 마사지 받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여자들만 고운 피부를 원하고 피부 노화를 막기 위해 애쓰는 건 아니다”고 허씨는 말한다.



    남자들이 ‘남성성’을 버리고 있는 징후는 비단 이뿐이 아니다. 여성들의 전유공간처럼 인식되던 성형외과와 백화점의 고급 화장품 코너를 찾는 남성들의 발길도 부쩍 늘었다. 드림성형외과 송홍식 원장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남자들이 사고나 질환으로 인한 장애가 있을 경우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 수술을 받았지만 최근엔 미용이나 개선의 목적으로 수술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엔 수술을 해도 티가 나지 않아야 한다고 요구한 반면, 요즘 남자들은 수술한 티가 나더라도 자신에게 어울리고 개성을 살리는 쪽을 원해요. 상담한 사람들이 즉석에서 수술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여성보다 성형수술을 과감하게 결정하는 것 같아요.”

    ‘남자답게 고쳐달라’는 주문보단 ‘호감 가는 스타일로 고쳐달라’는 주문이 많아지는 것에서 남성들의 변화된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남성이 너무 외모에 신경 쓰거나 꾸미는 데 치중하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비난하던 것이 과거의 인식이었다면, 지금은 외모도 멋지고 깔끔해야 자기관리를 잘하고 일도 잘하는 남자로 인식되고 있는 것. 현재는 남성의 비율이 전체 성형환자의 10% 남짓이지만 앞으로 그 비율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송원장은 전망한다.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시대인 만큼, 남성들도 꾸미면 여성만큼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성형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죠.”

    피부와 외모에 대한 남성들의 관심을 증명하듯, 화장품 업체들도 남성 전용 화장품을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스킨과 로션으로 구성된 기초화장품 외에 에센스, 자외선 차단제, 아이크림 등 남성 화장품의 종류가 다양해지는 한편, 용도도 모공전용, 노화방지, 피지제거 등으로 세분화되고 있다. 최근 남성을 위한 노화방지 화장품을 런칭한 아라미스는 ‘이제 남성도 피부 나이와 싸울 때’라는 공격적인 카피를 내걸었고, 로레알은 남성을 위한 전용 염모제를 출시해 눈길을 끌었다. 태평양의 자료에 따르면 남성화장품 시장 규모는 98년 1800억원대에서 2001년 2400억원대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너 들었니? 수염 뽑는 남자들이 있대!
    “요즘 남성들에게 아이크림 정도는 필수품이다. 남성 고객들이 시즌을 불문하고 화이트닝 제품을 찾는 것으로 보아 하얀 피부에 대한 열망도 여성 못지않다. 젊고 트렌디한 직업에 종사하는 남성들을 중심으로 화장품 사용의 성역이 무너지고 있다.”(비오템옴므 홍보담당 김지윤씨)

    자신의 개성을 인정받고 관심을 얻기 위해 피부를 관리하고 얼굴에 칼을 대는 남성들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남성상’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남성의 ‘힘’이 중시되던 전근대와 산업사회로부터 섬세함이 중시되는 정보화시대로 문화의 흐름이 바뀌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남녀차별이 점차 완화되면서 여성들이 원하는 남성상 역시 바뀌게 되었다.

    “거칠고 마초적인 이미지의 남성이 각광받던 시대의 여성들에게는 ‘저 남자에게 기대면 먹고살 수 있겠다’는 심리가 있었다. 이제 여성들의 교육수준과 경제력이 높아지면서 원하는 남성상은 ‘부드러운 남자’ ‘상냥한 남자’로 바뀌었다. 남성들 역시 연애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게 됐다”고 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말한다.

    아무래도 21세기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인간형이 이상적인 타입으로 각광받는 시대인 것 같다. 엉덩이 크고 아이 잘 낳을 것 같은 여자에서 호리호리한 여자로 미인상이 변한 것처럼, 이제 남자들은 ‘야성’과 ‘수염’을 뽑아버리고 ‘예쁜 남자’가 되길 원하는 걸까.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