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4

2002.03.07

‘셜록 홈즈’ ‘빨강머리 앤’ 제 모습 찾았다

변함없는 사랑 속에 영문판 완역 출간 … 세계 대중문학 최고의 캐릭터 명성 재확인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0-18 15:5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셜록 홈즈’ ‘빨강머리 앤’ 제 모습 찾았다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면서 수백여 개의 팬클럽을 거느리고, 죽은 후에는 박물관이 세워지고 전기까지 헌사받았으며 100년 세월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는 명탐정 셜록 홈즈와 ‘그린게이블즈의 빨강머리 앤’. 셜록(Sherlock)이라는 이름은 ‘수수께끼를 잘 맞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사전에 오르기도 했고, 앤 셜리는 주근깨에 빨강머리, 공상 많은 10대 소녀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림책, 아동용 소설, 만화, 영화, 연극, TV시리즈, 애니메이션까지 어린 시절 추억과 늘 같이하던 홈즈와 앤이 ‘완역본’ ‘성인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우리 곁에 왔다.

    ‘셜록 홈즈’ ‘빨강머리 앤’ 제 모습 찾았다
    셜록 홈즈 전집을 기획한 ‘황금가지’ 출판사는 최근 1차분으로 ‘주홍색 연구’ ‘네 사람의 서명’ ‘바스커빌 가문의 개’ ‘공포의 계곡’ 등 4편의 장편을 펴내고, 앞으로 57편의 단편을 작품 발표 순으로 모두 출간한다는 계획이다. 사실 셜록 홈즈를 아동용 캐릭터에서 성인용으로 성장시킨 것은 1970년대 ‘동서추리문고’의 역할이 컸다. 손바닥만한 판형에 세로쓰기로 10여년간 세계적인 추리소설 128권을 펴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홈즈 시리즈를 완역했다.

    황금가지의 ‘셜록 홈즈 전집’은 축약이나 중역이 아닌 영문판 완역이라는 점과 사냥모자에 코트를 입고 파이프 담배를 문 모습을 정설로 만들어버린 초판 당시 삽화(리하르트 거트슈미트, 시드니 파젯, 프랭크 와일의 그림)를 그대로 사용해 국내 셜로키언(셜록 홈즈 팬을 가리키는 말)들 사이에서 소장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0cm가 넘는 키, 너무 깡말라 훨씬 더 커보임. 찌르는 듯한 눈과 살집 없는 매부리코, 각지고 돌출한 턱. 생년월일은 1854년 1월6일(‘주홍색 연구’로 탐정 데뷔 당시 32세). 주소 런던 베이커가 221번지 B.

    동료 와트슨이 작성한 ‘홈즈 지식의 범위’를 보면 문학, 철학, 천문학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고 정치에 대한 지식은 약간 있지만 식물학에 대한 지식은 일부 독성식물에 대해 해박한 반면 실용적인 원예지식은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지질학 역시 여러 종류의 토양을 한눈에 구별하는 수준. 화학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고 해부학에 대한 지식은 정확하지만 체계가 없음. 범죄 관련 문헌에 대한 지식은 놀라 자빠질 정도. 바이올린 연주는 수준급. 목검술, 펜싱, 권투 실력은 프로급. 영국법에 대해서도 실용적인 지식이 꽤 있음.



    홈즈는 체계적인 교육이 아닌 자신의 실험과 관찰, 추리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 온 전형적인 아웃사이더 지식인이었다. “1000가지 범죄 행위를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꿰고 있다면 1001번째 범행의 비밀을 푸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말하며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행동파로, 에드거 앨런 포가 만들어낸 탐정 뒤팽에 대해 “15분간 침묵을 지킨 다음 그럴듯한 말로 친구들의 생각을 방해하는 수법은 아주 천박하고 자기과시적”이라며 비웃는다.

    홈즈는 런던 경찰이 난관에 봉착한 사건을 들고 와 자문을 구하고는 번번이 사건 해결의 공로를 독차지하는 모습에 비위가 상하지만, 진짜 그를 괴롭힌 것은 정체였다. 장편 ‘네 사람의 서명’에서 홈즈는 몇 달째 새로운 사건 의뢰가 없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하루에 세 차례씩 모르핀이나 코카인을 주사한다. 의사인 와트슨이 약물중독에 대해 일장 훈계를 하자 “내 마음은 정체를 못 견뎌 하네”라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처럼 완역 홈즈 시리즈를 통해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해내는 영웅 홈즈 대신 지극히 인간적인 홈즈를 만날 수 있다. 동시에, 명민한 독자라면 홈즈가 활약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의 경찰사법제도와 민주적 재판 과정의 확립, 과학과 이성이 초자연과 미신을 극복하는 모습, 영국의 식민지 인도와 서부 개척시대의 미국 등 세계사의 변화까지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셜록 홈즈가 냉철한 이성을 지닌 과학자이며 예술을 사랑하는 이상적인 신사의 모습으로 남성 팬들을 확보했다면,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섬에서 탄생한 앤 셜리는 낙천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의 이미지로 전 세계 100개국 어린이와 여성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셜록 홈즈’ ‘빨강머리 앤’ 제 모습 찾았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강머리 앤.’ 1979년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주제가다. 우리 기억 속의 앤은 말괄량이 삐삐처럼 영원히 자라지 않는 귀여운 소녀다. 그러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서른 살 무렵(1904~1905년, 집필 시작 연대에 대해 작가도 엇갈린 기록을 남겼다) 꼬마소녀 ‘빨강머리 앤’ 이야기를 쓰기 시작해 1939년까지 35년 동안 앤 셜리를 처녀에서 어머니로, 다시 할머니로 성장시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애초 몽고메리는 속편을 쓸 생각이 없었으나 1908년 ‘그린게이블즈의 빨강머리 앤’이 다섯 달 만에 1만9000부가 팔리는 등 대성공을 거두자 독자와 출판사의 끈질긴 요구에 밀려 속편 집필에 착수했다.

    ‘셜록 홈즈’ ‘빨강머리 앤’ 제 모습 찾았다
    최근 동서문화사가 국내 최초로 10권짜리 ‘빨강머리 앤 전집’을 완간함으로써 비로소 앤 셜리의 일생은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번역자인 김유경씨는 “소녀 시절 아버지(김천운)가 옮긴 ‘빨강머리 앤’을 읽으며 인생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느끼고 배웠다. 80년대 들어 앤 이야기를 우리 글로 옮기기 시작해 20년 동안 앤 셜리에게 내 모든 열정을 바쳤다”고 말한다. 김유경씨는 80년대 초 박순녀 선생과 함께 딱따구리문고에서 청소년용 12권짜리 ‘빨강머리 앤’을 번역하기도 했지만, 성인판 완역본은 이번이 처음이다.

    1권에서 고아소녀 앤은 앙숙이었던 길버트와 화해하지만 매슈 아저씨가 죽고 머릴러 아주머니의 눈이 급속히 나빠지자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2권 ‘처녀시절’은 애번리 초등학교에서의 교사생활을, 3권 ‘첫사랑’은 레이먼드 대학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4권 ‘약속’에서 앤은 길버트와 연애를 하고 서머사이드 교장으로 부임한다. 5권 ‘웨딩드레스’에서 드디어 길버트와 결혼, 6권 ‘행복한 나날’은 다섯 아이의 어머니로서 행복한 앤의 잉글사이드 시절이 펼쳐지고 7권 ‘무지개 골짜기’에서는 여섯 아이로 바뀌며 8권 ‘아들들 딸들’은 앤의 막내딸 릴러를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보통사람들의 삶을 소설 속에 묘사했다. 몽고메리는 8권으로 앤 셜리의 이야기를 끝내고 9, 10권에서 간간이 앤을 등장시키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이웃으로 넘어간다.

    몽고메리의 자전적 이야기로 알려진 ‘빨강머리 앤’은 출판사의 외면 속에 3년 동안이나 다락방에 처박혀 있다 우연한 기회에 햇빛을 본 작품이다. 초판 출간 직후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으나 문학적인 가치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어 캐나다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더니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혼수품으로 챙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유럽에서 다시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일본의 ‘앤’ 연구가로 유명한 마츠모토 유코는 ‘빨강머리 앤에 감춰진 셰익스피어’라는 책에서 몽고메리가 영국 문학에 대한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앤 시리즈를 집필하면서 자주 셰익스피어를 패러디했다고 주장하는 등 문학적 재평가 작업도 활발하다.

    이제 꿋꿋한 자립정신과 낙천적이고 순수한 열정을 지닌 빨강머리 소녀는 캐나다의 상징이 되었다. 소설의 무대 프린스에드워드섬에는 매년 3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려든다. 셜록 홈즈와 빨강머리 앤은 지난 100년 서구 대중문학이 만들어낸 최고의 캐릭터 상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