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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두의 그림 읽기|④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메디치 가문과 영욕 함께한 조각상들

  • < 노성두/ 미술사가·서울대 미학과 강사 > nohshin@kornet.net

메디치 가문과 영욕 함께한 조각상들

메디치 가문과 영욕 함께한 조각상들
꿈의 도시 피렌체. 조각가 첼리니의 까마득한 선조가 로마 시대 카이사르의 명에 따라 숙영지를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들꽃이 만발한 너른 땅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가 훗날 퇴역해 아르노 강변에 촌락을 이룬 것이 꽃의 도시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피렌체는 지금도 곳곳마다 문화의 향기가 넘쳐난다. 꼭 향수를 잔뜩 쏟아부은 것 같다. 오죽하면 ‘이탈리아 문예 부흥사’를 쓴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피렌체를 보고 반해 ‘도시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찬사를 보냈을까?

그런 피렌체에서도 시뇨리아 광장은 단연 보석이다. 광장에 들어서면 굵은 돌을 거칠게 깎아 지어 올린 시뇨리아 궁이 중세 성채처럼 반듯하게 서 있다. 성채 위에서 키 큰 종탑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광장을 내려다본다.

종탑에 걸려 있던 쇠종 ‘바카’는 공화정 체제의 자랑스런 상징이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家)의 알레산드로 공작이 끌어내려 녹이고 만다. 카를 5세에게 잘 보여 공작 직위를 얻었지만, 폭정을 일삼는 바람에 시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시민의 사랑을 받던 종소리가 메디치가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과 영욕 함께한 조각상들
광장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가 이탈리아의 눈부신 햇살에 근육을 불끈대며 시뇨리아 궁의 입구를 지킨다(그림 2). 광장 남쪽 조각 회랑에는 첼리니의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모가지를 든 채 여유작작한 자세로 서 있고 지암볼로냐의 ‘사비니 강탈’이 마니에리스모 조각 특유의 우아하게 꼬인 곡선미를 자랑한다. 또 시뇨리아 궁과 조각 회랑 사이의 틈새 골목을 따라가면 원근법적으로 정렬한 미끈한 기둥들이 우피치 안뜰 회랑의 조감을 뽐낸다(그림 3).





메디치 가문과 영욕 함께한 조각상들
우피치 회랑의 서늘한 무지개문 아래에는 피렌체 역사의 한 갈피를 장식하는 르네상스의 주인공들이 도열해 있다. ‘다비드’ 왼쪽으로도 서양미술사 교과서의 걸작들이 앞다투어 들어섰다. 도나텔로의 청동 ‘유디트’와 암마나티의 ‘넵투누스 분수 조각’, 그리고 지암볼로냐의 ‘코시모 1세 기마상’이 약속이나 한 듯 일렬 횡대로 늘어서 근대 조각사의 장관을 연출한다.

그러나 광장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시뇨리아 광장의 역사에 코를 박고 숨을 깊이 들이쉬면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따가운 먼지바람 속에 비릿한 피냄새가 섞여 코끝이 맵싸하다.

시뇨리아 광장은 13세기 이후 이탈리아 전역을 휩쓴 정쟁의 현장이었다. 왕당파와 교황파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은 단테가 쓴 유배 기록으로도 실감나게 전해진다. 르네상스 원근법을 발명한 알베르티도 가문이 오랜 추방 생활을 겪고 나서야 뒤늦게 귀향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피렌체 시민의 영혼에 미친 회오리바람을 불어넣었던 도미니크회 수사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한 곳도 이곳 광장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상화 모델이던 모나리자는 생전에 광장 한편에 쌓아올린 장작더미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미술과 어지간히 궁합이 안 맞았던 사보나롤라는 ‘미술이란 씻을 수 없는 유혹’이라면서 그림과 조각을 닥치는 대로 불살랐다. 하지만 제 육신도 똑같이 재가 될 운명이라는 건 몰랐나보다.

도시가 온전한 의미의 몸이라면 광장은 허파에 해당한다. 문화와 정치가 숨쉬며 시민과 호흡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15세기까지 시뇨리아 광장은 그랬다. 시민들은 광장을 공화정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러나 시뇨리아나 민회 그리고 메디치 가문이 차례대로 광장을 지배하면서 광장에 전시된 조각들도 정치적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같은 조각작품이라도 전시 장소나 전시 주체에 따라 아주 다른 뜻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16세기에 메디치가의 재집권이 장기화되면서 시뇨리아 광장은 메디치가의 정치 홍보를 담당하는 게시판처럼 바뀌고 만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피렌체는 일찌감치 상업과 금융에 눈뜬 만큼 시민계층이 빠르게 성숙한 도시였다. 14세기에 이미 국제 규모의 여신 업무를 보는 은행이 80여곳을 헤아렸다. 이들 은행은 교황과 왕족, 유수 귀족 가문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와 담보 수익을 챙기는가 하면, 원자재 수입이나 세제 혜택으로 뒷돈을 짭짤하게 벌어들였다. 떼돈을 벌어들인 유력 가문마다 지붕에 탑을 지어 올렸다. 멀리서 보면 피렌체 도성 안에 280개가 넘는 돌탑이 빼곡이 들어차 꼭 바늘주머니처럼 보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피렌체는 토스카나에서 으뜸가는 부자 도시였다. 이런 피렌체 시민에게는 안심하고 장사할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이 제일 큰 관심사였다. 이때 메디치 가문이 도시의 정치적 안정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때는 바야흐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성립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로마 교황청이 제각기 군사력과 교권을 배경삼아 반도의 패권을 두고 야심을 겨루었다. 여기서 메디치가의 능란한 줄타기 외교가 빛을 발했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이 노골적으로 시정을 간섭하고 피렌체의 다른 가문들을 배척하며 독점 지위를 고집하자 시뇨리아도 차츰 메디치가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미술사에 시뇨리아 광장이 등장한 첫번째 사건은 도나텔로의 청동 조각이었다. 원래 메디치 궁의 정원에 서 있던 청동 ‘유디트’는 1470년경 시뇨리아 궁 안뜰로 옮겨졌다. 메디치가의 반대세력이 거둔 첫 승리였다. 메디치가는 애당초 유디트를 자기 가문의 상징으로 삼았지만 시민들이 광장으로 전시 장소를 옮기면서 조각의 의미가 바뀌었다. 유디트는 지혜의 무기를 들고 권력의 목을 친 슬기로운 시민정치의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유디트에게 목이 달아난 홀로페르네스는 메디치가 압제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이때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졌다. ‘공공 안녕의 본보기로 시민들이 세우다. 1495년.’

메디치 가문과 영욕 함께한 조각상들
그러나 청동 ‘유디트’는 곧 대리석 ‘다비드’에게 광장 자리를 내주게 된다. 성서에 어린 양치기로 나오는 다비드는 미켈란젤로의 끌을 맞고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다비드는 원래 대성당 상부 장식으로 계획한 거상 조각이었다. 그런데 만들고 보니 덩치가 너무 커 대성당 위쪽으로 끌어올릴 방법이 없었다. 열띤 논란 끝에 시뇨리아 안뜰과 광장 중 한 곳으로 후보지가 좁혀졌다. 그러나 공공예술은 특권층의 눈요깃감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공유물이라는 주장이 먹혀 ‘다비드’는 광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1500년 전후의 피렌체 시민은 민병 의무를 지고 있었다. 자주권에 대한 신성한 대가였다. 팔매 끈을 틀어쥐고 적장을 노려보는 대리석 ‘다비드’는 당시 피렌체 시민의 의무와 권리를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다. 다비드가 세례 요한을 제치고 피렌체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오른 건 바로 이때, 그러니까 1504년부터다.

한편 공화주의자를 자처한 미켈란젤로는 ‘다비드’ 조각 때문에 메디치 가문에 미운 털이 박혔다. ‘다비드’와 한 쌍을 이룰 조각을 만들어달라고 시뇨리아로부터 의뢰가 들어왔지만,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의 눈치를 보느라 조각에 손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1515년 메디치가 출신 교황 레오 10세가 등극하면서 ‘다비드’는 풍전등화의 운명을 맞는다. 결국 1527년 ‘다비드’는 성난 군중 손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공화파와 메디치가 사이의 불화가 엉뚱하게 조각 작품으로 불똥이 튄 것이다. 다행히 팔다리가 으깨진 대리석 토막을 제자 바사리가 알뜰히 수습해 둔 덕분에 지금껏 우리나라 미술대학 실기문제에도 단골로 출제되고 있다.

1534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는 조각가 반디넬리를 시켜 ‘다비드’에 버금가는 조각을 한 점 만들어 세웠다. 알레산드로는 카를 5세에게 잘 보여 공작 작위를 받았지만, 성깔이 사납고 폭정을 일삼아 시민들의 원성이 자자한 정치가였다. 새로 만든 조각의 주제는 ‘헤라클레스’. 하지만 시민들은 ‘다비드’와 나란히 서서 시 청사 입구를 지키는 이 조각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도리어 헤라클레스가 카쿠스를 단방에 때려눕히는 모습이 시민 목줄을 조이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시민의 인기를 독차지한 ‘다비드’와 달리 ‘헤라클레스’ 조각은 조롱과 험담을 담은 시문과 대자보가 늘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1537년 알레산드로가 죽자 코시모 데 메디치가 권좌를 계승한다. 약관 열여덟의 코시모는 알레산드로보다 한술 더 떴다. 이삿짐부터 꾸려 시뇨리아 궁으로 집안 살림을 죄다 옮겼다. 공공건축이 개인 사저로 전용된 것이다. 원로회와 민회가 열리던 대회의실은 메디치 가문이 주도하는 우아한 무도장과 접견실로 개조되었다. 시뇨리아 광장은 공작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코시모가 대공 작위를 받은 후 대공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광장 조각들은 메디치가 통치 이념의 수단으로, 예술가들은 정치 선전의 시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광장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지만, 시민의 사랑을 영원히 잃고 말았다.

코시모는 또 광장 남쪽의 회랑에 친위 용병들을 상주시키고 경비와 치안을 맡겼다. 촌뜨기 용병이라는 뜻의 ‘란치’를 빗대어 지금도 ‘란치의 회랑’으로 불린다. 이곳은 그 후 첼리니의 ‘페르세우스’를 비롯한 고금의 조각들이 들어서면서 조각 회랑으로 변신한다. 괴물 메두사의 모가지를 번쩍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를 올려다보는 시민들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1555년 코시모는 시에나를 정복함으로써 토스카나의 마지막 숙적을 제거했다. 그 후 코시모는 오랫동안 꿈꾸던 해상권의 교두보 확보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광장에도 새로운 기념물이 추가되었다. 해신 넵투누스가 퍼런 물줄기를 뿜으며 포효하는 분수 조각이 등장했다. 넵투누스의 높이는 무려 5.6m. 4.34m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넵투누스의 겨드랑이에도 닿지 못했다.

광장의 정치미술 프로그램의 마지막 순서는 코시모 대공의 기마 조각상으로, 이것을 완성한 사람은 반디넬리였다. 광장을 쏘아보는 그의 눈빛은 피렌체 시민과 예술가들을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16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천재 예술가들이 새로운 예술의 메카를 찾아 유럽 곳곳으로 유랑하던 새 시대 피렌체 예술가들은 정치적 홍보물을 만드느라 땀을 쏟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부르크하르트가 피렌체에서 본 ‘예술 작품으로서의 도시’는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일까.





주간동아 2001.11.15 309호 (p66~68)

< 노성두/ 미술사가·서울대 미학과 강사 > nohshin@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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