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9

2001.11.15

“명당에 胎 묻어라”… 달밤 삽질 작전

경북 성주 태봉 풍수지리학상 조선 최고의 땅 소문 … 아기 가족들 너도나도 발길

  • < 최영철 기자 / 성주 > ftdog@donga.com

    입력2004-11-19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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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당에 胎 묻어라”… 달밤 삽질 작전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 해발 742m의 서진산 주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조그마한 이 돌산에 요즘 밤만 되면 무언가 ‘수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올 초부터 깜깜한 밤에 손전등을 들고 나타난 일단의 사람들이 죄지은 사람처럼 뭔가를 묻고는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 무슨 일인지 한번 물어보기라도 할 법한데 이를 확인하려는 주민은 아무도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 알지만 제지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반응이다. 사실 주민들도 태봉에 ‘그것’을 묻고 싶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금기’(禁忌)이기에 실행을 못하고 있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그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묻는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10월31일 오후 태봉에서 벌채하고 있던 마을 주민 이모씨(58)는 이 질문에 “뭐긴 뭐야 ‘태’지. 부모가 자식 잘되라고 하는 일을 누가 말리겠느냐”고 반문한다. 취재진이 “한번 파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자 “이 사람들이 천벌 받을 일을 하자고 하네. 아무리 면식 없는 남이지만 자식 잘되라고 묻어놓은 태를 파내면 당신들은 좋겠느냐”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서진산 태봉에 사람들이 묻은 것은 바로 ‘태’(胎).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의 탯줄이었다. 인체 적출물로 산부인과 병원에서 법적 처리절차를 거치거나 화장품, 약품 개발에 사용되는 탯줄이 이곳에 묻히고 있는 것.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병원 관계자나 폐기물 무단 처리범은 아니다. ‘수상한 이들’의 정체는 탯줄 주인인 아기의 가족(부모나 조부모)이 대부분. 일주일에 2~3쌍의 부모가 이 산에 태를 묻고 간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전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자식의 태를 이곳에 묻는 이유는 뭘까. 또 전국에 산재한 많은 산 가운데 왜 하필 서진산이고, 그중에서도 태봉이란 말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태봉’(胎峰)이라는 봉우리의 명칭과 연관이 깊다. 그리고 태봉이 겪어온 역사적 발자취를 살펴보면 의문의 ‘실타래’는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다.

    성주 서진산 태봉이 ‘태봉’(태실)이라 불린 것은 조선 제4대 세종대왕이 자신의 왕자 18명의 태를 이 봉우리 꼭대기에 묻으면서부터(1438년).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을 비롯해 안평대군 등 적자 7명과 의창군 등 서자 11명의 태를 이곳에 묻었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왕 단종의 태도 이곳에 묻혔다. 같은 시대를 살며 명암을 달리한 왕자들의 태가 이곳에 모셔진 것이다.



    “명당에 胎 묻어라”… 달밤 삽질 작전
    세종이 이곳에 왕자의 태를 묻은 것은 풍수지리의 핵심 이론인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에 대한 그의 ‘광신적’ 믿음 때문이다. 즉 태를 명당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여 ‘왕업’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세종은 전국에 지관과 신하(안태사)를 보내 왕자들의 태를 묻을 명당자리를 수소문한 결과, 조선 최고 명당이라는 성주 서진산 태봉을 찾아낸 것. 서진산 태봉이 세종에게 어느 만큼 명당으로 비쳐졌는지는 현재 전국에 퍼져 있는 20여개의 태실지 중 가장 많은 왕자의 태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점 외에도, 다른 사대부 소유의 무덤 터를 빼앗으면서까지 이곳에 태실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서진산 태봉 자리는 원래 13세기 고려 말 문신인 이장경의 무덤 터. 정말 터가 좋아 그런지 그의 아들 5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학문적 명성을 떨친 것은 물론, 그의 손자 이승경은 원나라 과거에 급제한 뒤 큰 공을 세워 조부 이장경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농서군공(西君公)으로 추봉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李稷)을 비롯, 많은 인재를 배출해 명문가로 자리잡으면서 이장경은 성주 이씨의 중시조가 됐다.

    이장경의 묘가 이장될 운명에 처한 것은 이 터가 ‘천하 명당’임을 알아본 지관들 때문. ‘성주군지’에 적힌 사연을 옮겨보면 이렇다.

    “세종의 명을 받은 신하와 지관들이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다 성주군 인촌리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큰비가 내려 이를 피하려고 인근 재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비를 피한 곳이 하필 이장경의 재실이었고, 이장경의 묘 자리를 본 지관들은 그곳을 천하 절세 명당 터로 지목했다. 임금(세종)은 보고받은 즉시 이장경의 묘를 이장하게 했다.”

    졸지에 천하 명당을 잃게 된 이장경 후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연의 일치인지 세종 당시 풍수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던 풍수학제조(風水學提調) 자리에 있던 사람이 바로 이장경의 후손이자 이직의 손자인 이정녕이었던 것. 그는 조상의 명당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장경의 무덤을 옮길 것을 요구한 조정 관리(안태사)들의 보고를 없었던 일로 무시한 죄로 파면되는 고초를 겪는다. 태종의 아홉째 딸이자 자신에게는 누이동생이 되는 숙혜옹주의 남편(부마) 이정녕을 파면하면서까지 무덤 터를 빼앗은 데서 세종이 얼마만큼 ‘태봉’에 집착했는지 엿볼 수 있다.

    이장경의 묘지 터 이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묘지 터 이장과 관련된 전설과 설화도 많다. 그중 제수천 성주문화원장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묘 이장이 결과적으로 세종의 탓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이곳(태봉)에 이장경의 묘지 터를 골라준 것은 한 스님이었는데, 그 스님은 아무리 후손이 잘되더라도 그의 무덤에 묘각을 짓거나 재실을 만드는 등 묘 치장을 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그 후 조상의 묘가 초라한 것을 송구하게 생각한 후손들이 묘각을 세우고 재실을 짓자 가세는 기울고, 임금에게 묘지 터를 빼앗겨버렸다.”

    결국 재실과 묘각을 세우지 않았으면 세종이 보낸 지관들의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곳은 정말 명당일까. 전주 우석대에서 풍수학을 강의하는 김두규 교수는 “성주 태실 터는 풍수지리학상 대표적 명당인 돌혈(突穴)에 속한다. 그중에서도 최고 명당인 대돌혈이 바로 이곳으로, 좌청룡 우백호 등 풍수의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다. 실제 산 아래에서 바람이 몰아쳐도 태봉 꼭대기는 바람 한점 불지 않는다. 대단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한편 이몽일 교수(경북대 지리학과)는 태봉과 이를 둘러싼 서진산이 그 자체로 태아와 자궁의 형세를 하고 있다며 이렇게 주장한다.

    “이곳은 어머니의 두 다리(서진산 줄기)가 청룡, 백호가 되고 자궁 깊숙이 자리잡은 태아가 바로 혈(태실 명당)인 형세다. 이때 서진산 주봉에서 태실이 안치된 혈까지 이어지는 산줄기(來龍)가 바로 탯줄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자식의 태를 묻은 부모의 마음처럼 그 자식들이 무병장수하거나 발복을 누린 것은 아니다. 사실 이곳에 태가 묻힌 왕자들의 말로는 그리 복되지 못했다. 단종 축출과 관련해 이를 반대한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이 유배되거나 죽었고, 이와 관련해 일어난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마저 유명을 달리했다. 이곳에 태가 묻힌 단종의 죽음은 더욱 비참했다. 게다가 세조는 임금이 된 후 이 다섯 형제의 태와 태실을 모두 산 아래로 파 던져 현재 이들의 태실은 기단만 남아 있을 뿐이다.

    김두규 교수도 “본래 명당의 ‘동기감응’이란 기가 센 유일한 사람에게만 일어나고, 지기(地氣)와 그 사람의 기운이 맞아떨어질 때만 일어난다. 태를 묻어봐야 지기와 맞지 않으면 오히려 화를 부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명당이란 소문만 듣고 무턱대고 자식의 태를 묻으려는 사람들이 과연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야밤에 태봉을 찾을까. 성주 서진산 태봉은 말없이 그들의 ‘무지’(無知)를 꾸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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