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9

2001.11.15

“정권 재창출보다 ‘성공한 대통령’이 우선”

DJ, 난국 돌파 ‘나 몰라라’… 정풍요구 외면으로 신뢰 상실, 동교동계 마저 조직보다 제살길 연연

  • < 조용준·김시관 기자 > abraxas@donga.com / sk21@donga.com

    입력2004-11-19 1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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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권 재창출보다 ‘성공한 대통령’이 우선”
    김대중 대통령이 이상하다. 정권재창출에 전혀 마음을 쏟는 것 같지 않다.” 민주당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다. 최근에 나온 얘기도 아니다. 민주당이 몇 차례 정풍파동에 휩싸이면서 당 일각에서 은밀하게 나돌던 소리였다. 그러나 최근 민주당이 창당 이후 최대의 혼선 국면을 맞으면서 이런 얘기는 더 자주, 그리고 더 강한 톤으로 들려온다.

    “DJ는 본인만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그래서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 당이야 재집권을 하든 야당으로 돌아가든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당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청와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똑같다. 햇볕정책이 성공해야 하고, 남북문제가 어떻고…. 당은 DJ 개인의 명예를 위해 희생되어도 좋단 말인가.”

    민주당의 무기력증과 침체 현상은 당내 이런 기류와 무관하지 않다. 대통령이기에 앞서 당 총재이기도 한 김대통령부터 당 문제에 소극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뾰족한 해법을 내놓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당의 이런 분위기는 김대통령이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동안 몇 차례 정풍운동과 쇄신파동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항상 동교동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매듭지어졌다. 대통령은 정풍 요구에 상응하는 ‘가시적인 조치’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차일피일 미뤄왔다. 김대통령의 레임덕은 이런 ‘신뢰의 상실’에도 큰 원인이 있는 듯하다.

    아직 임기 1년6개월을 남겨놓고 있는 김대통령의 정치적 위상은 역대 어느 대통령에 비할 바가 아니다. 김대통령의 인사정책과 리더십을 부정하는 소장파의 개혁 요구만 이번이 벌써 네 번째다. 과거 같으면 항명에 해당하는 행위다. 그럼에도 김대통령의 입장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믿었던 동교동계마저 위기 국면을 맞자 조직보다 개인의 정치생명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인다. 당내 일부 인사들은 “어차피 정권을 잡지 못할 바에야 제대로 된 야당이라도 만들자”며 자조 섞인 울분을 터뜨린다.



    “정권 재창출보다 ‘성공한 대통령’이 우선”
    소장파의 인적 쇄신 요구가 확산되면서 김대통령의 권위는 더욱 추락했다. 해법을 찾기 위해 청와대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했지만 이인제 김근태 정동영 최고위원 등이 면전에 대고 “못 가겠다”며 버티고 있다. 최고위원마저 김대통령과 당 지도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형국이다.

    소장파 인사들은 더 나아가 “당과 국회의 공정한 운영을 위해 대통령이 당 총재직을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도 서슴없이 입에 올린다. 97년 10월 당시 이회창 후보 진영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몰아붙인 형국과 비슷하다. 몇몇 DJ 충성파는 “판을 깨자는 해당행위”라며 이들의 언행을 비판하지만, 사태가 대선주자들의 파워게임으로 변질된 배경에는 무기력한 청와대와 별다른 통제 수단이 없는 여권의 현실적 한계가 일조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김대통령은 현실적으로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당·정·청 개편 △권노갑 전 최고위원과 박지원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의 거취 정리 △당의 새로운 지도체제 구성 및 당 내분 수습 △전당대회 및 경선 관리 등 어느 것 하나 뚜렷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김대통령과 가까운 한 소장학자는 “지금 특단의 묘수란 없다”며 “김대통령은 이제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각오로 국정에 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즉생(死卽生) 전략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이 아니면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며, 섣불리 상황을 봉합하려다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

    민주당 한 관계자도 비슷한 견해를 밝힌다. 이 인사는 “내 생각대로 국정을 끌고 가겠다는 DJ 특유의 독선적 통치 스타일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래야만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인사들이 있을 경우 “떠날 테면 떠나라”는 과감성도 보일 수 있다는 것.

    청와대는 이 같은 발상 전환에 대해 부정적이다. 한 관계자는 “김대통령은 절대 무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지 않았는가”고 반문한다. 검증되지 않은 방안을 내걸고 도박할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견해도 있다. 오랫동안 외곽에서 김대통령의 자문역을 맡았던 한 인사의 설명. “대통령의 힘은 적절한 채찍과 당근에서 출발하는데 김대통령은 이미 채찍을 잃어 버린 상황이다. 그렇다고 당근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힘과 카리스마는 사라졌지만 여권 인사들을 유인할 당근은 아직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그가 말하는 당근은 이른바 당권과 대권을 의미한다. 이런 차원에서 최근 논의되는 당정개편과 조기전대론은 무너진 권위와 파워를 복원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물론 잘 쓰면 약이고 잘못 쓰면 독이다.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 시기에 대한 김대통령의 생각은 ‘지방선거 이후’라는 것이 정답에 가깝다. 이에 대한 공식적 발언은 “당에 일임했으며, 당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것이지만, 자신의 통치력이 급격히 추락할 수 있는 중대사를 당에 맡겨놓고 있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 총재직 이양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역대 모든 대통령이 그랬듯 김대통령 역시 마지막까지 총재직을 내놓지 않거나, 내놓더라도 대선을 몇 달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좋은 분위기’에서 최대한의 생색을 내면서 내놓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이런 생각은 이제 중대국면에 직면해 있다. 당이 처한 상황이나 개혁그룹의 ‘도전’은 김대통령이 더 이상 ‘안이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거부한다.

    전당대회 시기 문제는 민주당 내 각 대선주자마다 이해가 엇갈리면서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통합 조정이 결코 쉽지 않다. 우선 1월 전당대회 개최 여부를 둘러싸고 이인제 진영과 반이인제 진영이 서로 일합을 겨루고 있다. 1월 전당대회를 주장하는 경우에도 계산은 동상이몽이다. 이위원측은 지방선거 전 후보 조기가시화를 주장한다. 2단계로 나뉘어 당권과 대권 후보를 분리해 뽑는 것은 반대한다. 반면 한화갑 최고위원측은 2단계 전대론에 찬성하고 있다. 소장파 의원들도 기존의 당 세력구도를 바꿔 새로운 중심축을 형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체로 1월 전당대회를 선호하는 편이다. 한화갑 최고위원이 당 대표를, 개혁세력이 당의 요직을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다.노무현 김근태 최고위원은 이인제 최고위원을 공동으로 견제하는 차원에서 한위원과 연대를 모색하는 분위기다.

    김대통령이 난마처럼 얽힌 대선주자들의 이해관계를 어떤 방법으로 통제하고 정리해 나갈지 지금으로서는 예단하기 힘들다. 각 대선주자 진영은 김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며 차별화를 기하고 있지만 아직 마지막 선은 넘지 않고 있다. 전당대회 과정의 불이익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김대통령은 이해관계가 얽힌 전대 문제를 조정하며 자신의 위상을 회복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위기를 몰고 온 지도부 공백 문제 역시 기회로 역이용할 여지는 남아 있다. 현재 당내에서는 과도체제 수립 방안으로 서너 가지 시나리오를 거론한다. 대표 최고위원만 지명하고 주요 당직자를 교체해 비상체제로 운영하는 방안, 임명직 최고위원 5명을 다시 지명하는 방안, 전당대회 권한을 위임받은 당무위원회의에서 다시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방안 등이다. 김대통령은 이 가운데 유리한 카드를 뽑아 각 대선주자들과 거래할 가능성이 높다.

    김대통령은 7일 청와대 최고위원회의를 통해 이번 사태의 가닥을 잡아나갈 계획이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대통령이 현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며 중대결단설을 흘리고 있다. 경우에 따라 당 총재직을 넘기고 국정 운영에만 전념하는 상황이 예상보다 빨리 닥칠 수도 있다. 그러나 쾌도난마(快刀亂麻)식의 묘수를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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