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2

2001.09.20

아이 망치는 ‘유아 비디오증후군’

잦은 학습 비디오 시청은 뇌 발달 저해… 심할 경우 사회성 이상·의사소통 장애

  • < 신의진/ 세브란스 병원 정신과 교수 >

    입력2004-12-22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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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망치는 ‘유아 비디오증후군’
    세 살 난 성갑이(가명) 엄마는 요즘 자신의 과욕이 불러온 결과에 대해 크게 후회하고 있다. 성갑이 엄마는 성갑이가 첫돌이 되기 전부터 두 살 터울 형이 보던 영어와 한글 교육용 비디오 테이프에 관심을 보이자 날마다 학습 비디오를 보게 했다. 비디오 학습을 통해 아들의 영재성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돌이 지나면서 성갑이는 비디오를 보여주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로 비디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잠시뿐. 성갑이가 영어 알파벳과 간단한 단어를 정확히 기억하고 말하자 그녀는 오히려 시청 강도를 높였다.

    그러나 영재가 되기를 꿈꾸던 성갑이는 현재 의사소통은 고사하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한다. 또래 아이들보다 성장 속도가 한참이나 뒤진 상태다. 고작 하는 말이라곤 ‘car’라는 영어 단어를 혼자말로 되뇌이는 것뿐이다. 오직 자동차 놀이에만 몰두할 뿐이고, 엄마가 부르거나 외부에서 자극을 줘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동네 소아과에서는 “자폐증이 의심된다”고 진단했다. 놀란 성갑이 엄마는 대학병원 소아정신과를 찾았고, 정밀진단 결과 성갑이의 질환은 자폐증이 아닌 ‘유아 비디오증후군’으로 진단되었다.

    사람의 두뇌는 다른 장기와 달리 기능 발달이 사춘기까지 이루어지며 특히 영유아기 두뇌발달은 외부환경 자극에 민감하다. 그 중에서도 부모를 포함한 가까운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다. 아동발달에 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영유아들은 생후 8∼9개월부터 사회성을 습득하는데 오감(五感)을 통한 다양한 자극 등으로 두뇌발달이 촉진되고 사회구성원이 갖춰야 할 사회성과 정서·인지발달 등이 이루어진다는 것.

    그러나 아이들이 따뜻한 부모의 손길과 대화 대신 비디오라는 강렬한 시각적 자극과 기호화한 메시지(영어 알파벳이나 한글)만을 받아들이면 두뇌의 특정부분 즉, 시각정보를 받아들이는 뇌 신경세포망의 과잉발달을 불러올 수 있다. 실제 영유아기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학습수준은 몸으로 느끼는 경험, 외부의 직접 자극을 통한 습득 정도에 한정한다. 영유아들은 고난이도의 지적 자극을 받아들일 만큼 뇌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기교육 열풍에 따른 무조건적인 학습 비디오 시청은 정상적인 뇌 발달을 저해할 뿐이다. 또 비디오나 TV 시청 같은 간접적 경험은 외부환경에 대한 호기심을 잃게 하거나 학습에 소극적인 아이를 만들 수도 있으므로 다양한 지적 자극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조기교육과 영재교육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는 많은 아이에게 돌 이전부터 비디오나 TV의 장시간 시청을 강요하였으며, 아이는 그 자극만을 즐기면서 점차 ‘중독증’에 빠진다. 이런 아이들은 부모와 형제를 포함한 주변 사람과 눈도 맞추기 싫어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급기야 대화 자체를 아예 거부하는 단계로 발전한다. 문제는 이렇게 의사소통 장애와 사회성 발달의 이상을 보이는 ‘유아 비디오증후군’이 특정한 아이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증후군 그룹’을 이룬다는 점이다.

    최근 필자를 찾아온 민철이(가명, 초등학교 3)는 지능지수(IQ)가 134로 높은 지적 학습수준을 지녔는데도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포기한 경우였다. 서로의 일에 바쁜 부모가 불화를 겪는 가운데 민철이는 어머니가 시간 때우기 식으로 보여주는 교육용 비디오와 TV 시청에 몰두했고, 네 살부턴 컴퓨터게임에 자신의 모든 관심을 집중했다. 그 결과 민철이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기억력은 뛰어났으나 단순히 사물의 명칭만을 말할 뿐 의미는 파악하지 못했고, 국어 등 이해력을 필요로 하는 공부는 회피했다. 더구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스트레스나 지시를 거부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등 자기 감정의 조절기능을 상실해 학교에선 이미 ‘왕따’가 되어 있었다.

    결국 민철이도 영재교육 때문은 아니지만 부모 때문에 비디오를 보기 시작한 것은 다른 유사 비디오증후군 환자와 마찬가지다. 다만 민철이의 경우 눈여겨봐야 할 점은 부모의 방치로 비디오증후군이 선천성 자폐증과 학습 부진 같은 유사 질환과 혼동할 만큼 질환이 심해졌다는 부분이다. 만약 이런 질환으로 오진할 경우 민철이 같은 환자는 적절치 못한 치료와 교육 때문에 자칫 영원히 치료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 더욱이 치료 중 자폐증 환자나 학습 부진아와 섞여 지냄으로써 그들의 행동양태를 모방하는 역효과를 불러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유아 비디오증후군도 조기에 발견하면 치료가 그리 어려운 질환은 아니다. 상태가 심하지 않은 경우 발견 즉시 비디오나 TV 시청을 중단하면 금세 상태가 호전되기도 한다. 단 이후로도 증상에 호전이 없으면 전문의와의 상담과 지속적 관찰을 통해 아이에게 부족한 사회성을 키우기 위한 심리발달 및 언어장애 치료를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 우울증이나 정서 불안증 같은 합병증으로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아이에겐 약물치료도 필수적이다. 아이의 상태에 따라 6개월에서 일 년 정도의 치료기간이 지나고 나면 눈에 띄게 증상이 호전된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 평상시 아이의 상대자인 엄마가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비디오 증후군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것.

    사실 유아 비디오증후군은 영유아들이 하루 5시간 이상 TV를 본다는 터키를 제외하면 서구 선진국에선 보고 사례조차 없는 독특한 질환이다. 선진국의 경우는 장시간의 비디오 시청이 소아비만에 따른 각종 질환을 불러온다는 이유로 영유아의 TV·비디오 시청을 엄격히 금하기 때문에 이런 질환이 발생할 까닭이 없다. 실제로 미국소아과학회는 만 2세 이전 아이의 TV 시청을 철저히 금하는 한편, 부모와의 놀이시간을 늘릴 것을 강력하게 권하기도 하다.

    ‘질병은 치료보다 예방이 중요하다’는 말은 유아 비디오증후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의 부모도 이제 비디오 영재교육의 환상에서 벗어나 만 2세가 지나야만 비디오를 보여주며, 그 시간도 하루 1시간 내에서 일주일에 2∼3개 정도로 제한하는 게 어떨까. 적어도 자식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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