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2

2001.09.20

감탄사로 바뀐 ‘씨바’와 ‘졸라’

  • < 민경배 / 사이버문화연구소장 >

    입력2004-12-21 16: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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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탄사로 바뀐 ‘씨바’와 ‘졸라’
    채팅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채팅방에서 사용하는 독특한 언어 때문에 당혹감을 느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를 “안냐세요”로, “반갑습니다”를 “방가방가”로 표기하는 채팅방 고유의 인사말부터 시작해서 “ㅎㅎㅎ”, “ㅋㅋㅋ” 같은 웃음소리나 각종 이모티콘을 동원한 다양한 얼굴표정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공간에는 이상하고 신기한 통신언어의 세계가 무진장 펼쳐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네티즌들의 통신언어를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많이 들려온다. 과도한 축약어, 맞춤법을 무시한 비어, 그리고 은어의 남발이 문법을 파괴하고 우리말을 오염시킨다는 지적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원래 이같은 표기 방식은 타이핑 회수를 줄임으로써 전화비를 아끼기 위한 일종의 경제적 전략으로 개발한 것이다. 통신언어의 사용을 옹호하는 사람도 신속한 의사소통을 통한 통신비 절약 효과를 주된 근거로 들고 있다. 하지만 이미 많은 가정에서 ADSL을 통해 월 정액제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오늘날에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설명이다. 오히려 지금의 통신언어는 통신비 절약보다도 네티즌들만이 갖는 하위문화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통신언어 이젠 양지에서 수용을

    사실 조금만 시야를 넓혀보면 하위문화로서의 고유한 언어를 구사하는 곳은 통신공간 이외의 다른 데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군대나 교회가 그러하고, 법률가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 집단들도 마찬가지다. 일반인이 듣기에는 상당히 어색할 뿐 아니라 심지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그들 하위문화에 속한 사람 사이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통용되지 않는가? 통신언어 역시 그저 통신공간에서 통용되는 네티즌들의 고유한 하위문화일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통신언어가 못마땅한 분들은 틀림없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왜 하필 맞춤법을 헝클어뜨리고 문법을 파괴해야만 직성이 풀리느냐고.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통신언어는 ‘글’이 아니라 ‘말’이기 때문이다. 통신공간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모니터 위에 문자로 표현되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 이것이 글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네티즌들의 타이핑은 통신공간 위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행위인 경우가 훨씬 많다. 그리고 문법적으로 잘 정제되어 있어야 하는 글과 달리 말이란 원래 비문법적으로 사용한다. 아무리 학식이 높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을 그대로 글로 옮겨본다면 지극히 비문법적인 언어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통신언어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다른 것은 다 이해한다고 치자. 하지만 걸핏하면 ‘씨바’니 ‘졸라’니 하는 욕설을 사용하는 것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딴지일보에서부터 비롯한 이같은 말투는 이제 네티즌들의 언어에서 흔히 나타나는 관용어같이 되어 버렸다. ‘씨바’나 ‘졸라’와 같은 단어는 분명 기존에 널리 사용하던 욕설에서 빌린 말이다. 하지만 지금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단지 강조를 나타내기 위한 감탄사나 추임새와 같은 용도로 사용하고 있을 뿐 욕설의 의미를 담지는 않았다. 비약일지는 모르겠으나 통신언어가 음지의 욕설을 양지의 감탄사로 순화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줘야 할 일이다.

    영어사전의 교본으로 평가되고 있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최근 ‘B4(Before:전에)’ ‘TX(Thanks:고맙다)’ ‘BBL(Be Back Later:곧 돌아오마)’ ‘BCNU(Be Seeing You:나중에 보자)’ ‘HAND(Have A Nice Day:좋은 하루 되길)’ 같은 줄임말과 ‘-)’(기쁘다) ‘-O’(놀랍다) ‘-Q’(이해할 수 없다) 등의 이모티콘을 정식으로 포함시킨 개정판을 발간했다. 언어는 동시대 사회현상을 대변하는 만큼 더 이상 통신언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출판사측 설명이었다고 한다. 새로운 조류를 거부하고 배척하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양지로 이끌어 내려는 자세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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