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1

2001.09.13

“2만 평 농사져 봤자 회사원 연봉도 안 돼요”

전업농 이명규씨의 대차대조표 … 영농비 빼고 대출금 갚으면 손에 남는 건 2천여 만 원

  • < 김진수 기자 > jockey@donga.com

    입력2004-12-17 14:0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2만 평 농사져 봤자 회사원 연봉도 안 돼요”
    대풍(大豊)이면 뭐해? 마음은 흉년인데….”

    지난 8월29일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평3리.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혼자 낮술을 들이켠 이명규씨(43)는 쓴웃음부터 지었다. 재떨이엔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전업농인 이씨는 23년 경력의 전형적 농꾼. 고교 졸업 후 바로 쌀 농사에 뛰어들었으니 이력이 붙을 대로 붙은 셈. 그런 그도 요즘 부쩍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다. ‘쌀 농사를 계속해야만 하나’ 시시각각 회의가 들지만, 그렇다고 선뜻 ‘일’을 접기도 마뜩찮아서다.

    이씨의 경지면적은 130마지기. 1마지기가 200평이니 모두 2만6000평. 이 중 1만5000평은 그의 소유. 나머지 1만1000평은 소위 ‘도지’로 불리는 임차 논이다. 통상 전업농 평균 경지면적이 1만∼2만 평쯤 되니 면적으로만 보면 평균을 조금 웃도는 수준. 하지만 이씨는 “경지가 넓으면 영농비가 그만큼 비례해 늘므로 대농(大農)을 제외하곤 대다수 전업농 사정은 엇비슷하다”고 털어놓는다.

    벼이삭이 누렇게 익을수록 더욱 타들어가는 농심(農心). 도시에선 이런 모순된 농촌 현실을 좀처럼 체감하기 힘들다. 해마다 이맘때쯤 ‘자괴감’에 빠지는 농민들의 속내는 어떨까.



    “2만 평 농사져 봤자 회사원 연봉도 안 돼요”
    이씨의 ‘영농일지’를 꺼내 그와 함께 지난 한해 농사의 대차대조(貸借對照)를 직접 따져보기로 했다. 쌀 문제가 국가적 이슈로 떠오른 올해의 경우 아직 본격적인 추수는 물론 추곡수매 전이어서 실제에 근접한 예상 수익을 사실상 뽑아내기 힘들다. 더욱이 정부의 쌀 수급정책이 유동적이어서 뽑아봐야 무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철원평야의 경우 자연재해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기후조건을 갖춘데다 수도(水稻) 경작에 최적인 토질을 지녀 해마다 작황이 고르다. 때문에 지난해 결산을 통해 올해 수익을 대략 가늠할 수 있다는 게 이씨의 얘기다.

    이씨의 지난해 벼 수확량은 5만8830kg. 벼 115kg은 도정한 쌀 1가마(80kg)에 해당한다. 따라서 2만6000평에서 생산한 쌀은 511가마. 보통 철원지역에선 200평당 평균 4.5가마의 쌀을 생산하므로 이론상 그의 지난해 쌀 생산량은 585가마가 되어야 하지만 실제 수확량은 이에 조금 못 미쳤다.

    이씨는 이 가운데 자가소비(종자 포함)할 쌀 10가마(벼 기준 1150kg)를 뺀 벼 5만7680kg을 내다 팔았다. 이 중 정부 추곡수매분은 1만4560kg으로 kg당 1478원을 받았다. 또 동송농협과 수매계약을 맺고 재배한 철원지역 브랜드인 ‘오대벼’ 1만8000kg을 kg당 1530원에 팔았고, ‘오대벼’가 아닌 일반 벼 1만120kg을 역시 농협에 일반수매 형태로 팔았다(kg당 1380원). 최종으로 남은 벼 1만1500kg은 도정 및 위탁판매 수수료로 판매량의 6%(쌀 기준ㆍ100가마당 6가마를 현물 지불)를 내기로 하고 개인 정미소에 맡겼다. 쌀 1가마당 위탁판매가격은 16만4000원. 이렇게 해서 이씨가 지난 한 해 벌어들인 조수익(영농비를 빼지 않은 생산매출)은 7288만4888원. 순수익은 과연 얼마나 될까. 다시 계산을 해보자.

    지출은 크게 영농비 지출과 영농자금 상환으로 나뉜다. 우선 이씨가 지난해 추수비용으로 쓴 돈이 312만 원. 논 1평당 120원이 들었다. 또 콤바인·트랙터·이앙기 등 농기계 작동에 필요한 유류대를 100만 원 지출했다. 영농비 중 가장 비중이 큰 농약대는 평당 1500원꼴. 2만6000평이니 390만 원이다. 비료값 역시 100만 원 가량 들었다.

    이뿐 아니다. 7년 분할상환 조건인 농기계 구입자금을 갚는데 이자(연리 5%)를 포함, 1000만 원을 지출했다. 또 농업기반공사에서 18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빌린 이씨 소유의 농지 매입자금(연리 4.5%)도 해마다 1000만 원씩 빠져 나간다. 정부에서 빌린 농업경영자금(연리 5%)도 500만 원 갚았다. 여기에 빌린 농지 임차료가 1527만2000원이다.

    이렇게 ‘차(車)ㆍ포(包)’ 떼며 한 해 농사를 결산한 뒤 이씨 손에 떨어진 순수익은 2259만2888원. 혹 전자계산기가 잘못 되었나 싶어 다시 두드려 봤지만 ‘역시나’였다. 더욱이 아직 농기계 감가상각비와 이씨 가족의 인건비는 제하지도 않았다. 이씨는 “실제 영농 종사일수가 70일 정도고, 기계화 영농 덕분에 인부를 따로 쓰지 않아 인건비는 별도 계산하지 않았다. 결국 1년 농사 지어 인건비 정도 건진 셈이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경우에 따라선 웬만한 도시근로자 1명의 연봉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이런 현상은 3, 4년 전부터 이어진 것이어서 이씨에겐 새삼스럽지도 않다.

    사정이 이러니 저축할 여유라곤 찾을 수 없다. 이씨 가족은 노모(81)와 부인(43), 군에 간 큰아들(22)과 대학생 딸(20), 고등학생인 작은아들(18) 등 모두 여섯 식구. 학비·생활비 등 용처가 많아 이리저리 쪼개다 보면 ‘잘해야 본전’이다. 해마다 뼈빠지게 일해봐도 이씨의 예금통장에 몇 년 전부터 찍힌 ‘-2400만 원’은 조금도 줄지 않고 내년에도 ‘주홍글씨’처럼 남을 전망이다. 해마다 부지런히 갚는데도 아직 4000만 원 가량의 농가부채도 남아 있다.

    철원군 내 쌀 전업농은 350여 명. 동송읍에만 150여 명이 있다. 하지만 경지가 8만∼9만 평에 이르는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이씨의 처지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정부가 올해 추곡수매량을 조금 늘린다고는 하지만 실제 피부에 와 닿는 건 없다는 게 농민들 정섭니다.” 이씨는 농민들이 ‘오늘과는 다른 내일’보다 ‘어제 같은 오늘’에 더 익숙해졌다고 한다. 그에겐 1980년대 초 ‘복합영농’의 미명하에 정부가 권장한 소 사육에 뛰어들었다 실패한 쓰라린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그는 송아지 6마리를 마리당 120만 원에 사서 3년 간 키웠지만 축산기반 붕괴로 결국 마리당 50만 원의 헐값에 넘겨야 했다.

    ‘전국 최고의 맛과 고품질, 청정 철원 오대쌀, 철원군 쌀전업농연합회’. 이씨의 지프차 뒷유리에 인쇄된 글이다. 그는 과연 농민임을 자부하고 있을까.

    “희망이 ‘절벽’이야.” 추수를 앞둔 나락을 살피러 논으로 향한 그가 혼자말처럼 툭 던진 한마디였다. 이날 따라 들녘엔 늦더위가 유난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