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6

2001.05.31

역사는 늘 새롭게 해석된다

  •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5-01-31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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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늘 새롭게 해석된다
    1993년 이인화의 역사소설 ‘영원한 제국’, 95년부터 시작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96년 출간 이후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이 책들은 90년대 중반 역사의 대중화를 주도하며 역사서 붐을 일으켰다. 그러나 대중화의 이면에는 ‘역사왜곡’이라는 그늘도 있다. 비전공자들이 쓴 역사서가 흥미 위주로 흐르다 보니 사실 자체를 훼손하는 행위가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학자들 역시 왜곡의 함정에 빠진다. ‘한국사 그 끝나지 않는 의문’의 저자인 사학자 이희근씨는 “민족주의 사관에 경도된 나머지 찬란한 우리 역사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결과적으로 왜곡된 역사상을 구축하고, 실증사학이란 미명하에 기록 자체에 매몰된 채 그 현상만 추구하여 이면에 담긴 진실을 도외시했다”고 지적했다. 역사왜곡의 폐해에 대해 한신대 유봉학 교수(국사학과)는 “역사에 대한 이해수준은 현실인식의 수준과 일치하게 마련이며, 잘못된 역사관은 현실을 왜곡된 시각으로 인식하여 현실문제를 호도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운명적으로 사료와 해석, 왜곡과 조작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역사’라는 학문과 대중은 어떻게 만날 것인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세 권의 책을 보기로 하자.

    유봉학 교수의 ‘정조대왕의 꿈’은 소설 ‘영원한 제국’에 대한 반론이다. ‘영원한 제국’이 출간된 지 이미 8년이 지났으니 때늦은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소설의 상업적 성공으로 ‘정조독살설’이나 ‘화성천도론’ 등이 근거 없이 확산되는 것을 보며 학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뒤늦게나마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했다. 유교수는 정조가 독살되지 않았다는 정황 증거를 제시하며 “근대로의 개혁이 과단성 있는 지도자 정조 한 사람에 의해 진행되다가 독살이라는 폭력적 방법으로 지도자가 시해되자 이후 그가 추진한 근대로의 개혁이 좌절되었다는 식의 상황 설정은 1인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는 양반관료체제인 조선에서 군주의 위상과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정조를 우상화하는 우를 범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유교수는 ‘진경시대’에 대해 “조선성리학의 사상적 기초 위에 조선적 개성이 물씬 풍기는 독창적 예술세계가 열린 것”이라며 진경문화의 성격과 급속히 조락한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최근 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진경시대란 있는가”에 우회적으로 답했다.



    ‘정조대왕의 꿈’이 반론형식이라면 이희근의 ‘한국사 그 끝나지 않는 의문’은 일종의 도발이다. 이씨는 이미 상식이 된 역사에 ‘의문부호’를 달고 새로운 각도의 해석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는 아유타국(인도)의 공주였을까. 저자는 한 가지 사료를 곧이 곧대로 해석하는 실증주의 연구의 오류를 지적하며, 허왕후는 실제 인도에서 온 것이 아니라 불교를 신봉한 가야가 불교성지인 인도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허왕후의 기록을 꾸몄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온조와 비류는 과연 형제인가’(답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라든가 ‘무신 집권자들은 왜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을까’ ‘김윤후는 과연 몽고 장군 살리타이를 살해했는가’ 등의 의문에 하나하나 답변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끝으로 ‘바다의 가야금’은 일본 작가인 고사카 지로가 쓴 역사소설이다. 이 역사소설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놓친 역사인물을 일본의 작가가 복원했기 때문이다. 우리 중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에는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조선에 투항한 일본 장수 ‘사야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일본의 고교 역사 교과서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분 없는 출병에 반대하고 조선에 투항한 일본무장 사야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러나 조선에 귀화한 후 김충선의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공식 사료에 몇 차례 등장하나, 일본에서의 출신 성분이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없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 학자들은 아예 그의 존재를 부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역사소설의 대가인 고사카 지로는 일본과 한국의 역사적 문헌들을 조사하고 취재한 끝에 김충선의 일본 이름이 ‘사야가’가 아니라 ‘사이가’였음을 밝혀냈다. 일본 전국시대에 화승총으로 유명했던 사이가 철포부대의 장수 스즈키 고겐다이가 바로 김충선이라는 전제에서 이 소설이 시작한다.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한 소재를 일본 작가에게 빼앗긴 게 안타깝지만 독자 입장에서 이처럼 역사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작가의 손길이 반갑기 그지없다. 역사학자든 소설가든, 역사는 늘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며 묵묵히 우리 앞에 있다.

    ·정조대왕의 꿈/ 유봉학 지음/ 신구문화사 펴냄/ 312쪽/ 1만원

    ·한국사 그 끝나지 않는 의문/ 이희근 지음/ 다우 펴냄/ 320쪽/ 9800원

    ·바다의 가야금/ 고사카 지로 지음/ 양억관 옮김/ 인북스 펴냄/ 392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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