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6

2001.05.31

“제구력·왼손타자 걱정 이젠 끝!”

투구동작 바꾼 박찬호, 사사구·좌타 콤플렉스 극복… 부진한 팀 공격이 20승 최대 걸림돌

  • < 허구연 / 야구해설가 koufax@netian.com>

    입력2005-01-31 1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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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구력·왼손타자 걱정 이젠 끝!”
    올봄 LA 다저스의 캠프장인 플로리다 베로비치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부와 명예를 보장받는 자존심 강한 선수들 중엔 ‘난 메이저리거야’라는 오만함이 깃들인 사람들도 있고 마이너리그에서 갓 올라와 라커 룸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어린 선수들 모습도 보였다. 메이저리그가 공정한 경쟁관계 속에서도 실력과 힘의 논리가 우선하는 세계임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스프링 캠프장이다.

    그런 가운데도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박찬호였다. 다른 메이저리거들이 훈련이 없는 시간에 골프, 낚시, 쇼핑 등으로 소일하는 동안 그는 연습이 끝난 후에도 어김없이 백인 아주머니에게서 영어과외를 받고 있었다. 구단 관계자들에게 박찬호의 이러한 철저한 자기관리 태도가, 단순히 공만 잘 던지는 투수가 아닌 진정한 프로의식을 지닌 청년의 모습으로 비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박찬호가 몸 하나로 연간 130억원의 연봉을 받는 스포츠 재벌에 오르기까지 겪은 숱한 고통과 시련 역시 만만치 않았다.

    지난 94년 1월 공주 촌놈이 메이저리그 직행이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느낀 얼떨떨한 기분은 잠깐이었다. 고작 두 경기를 치르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간 그를 기다린 것은 2년여 동안의 더블A와 트리플A 생활. 젊은 청년 박찬호도 94년 한때 짐을 싸 한국으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고민 속에 눈물로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고 털어놓는다. 그곳에서 ‘프로의 냉엄한 현실과 독한 냄새’를 진하게 맡은 것이 오늘의 그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마이너리그가 그에게 준 보탬은 크다. 공주고 시절부터 사용한 그의 투구동작은 하이 키킹(high-kicking)이 특징이었는데, 스스로 우상으로 여긴 강속구의 대명사 놀란 라이언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투구자세는 제구력과 체력소모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마이너리그에서 버트 후튼(현 휴스턴 애스트로스 투수 코치) 등 좋은 지도자들을 만나며 간결하고도 리드미컬하게 바뀌었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스피드에 제구력까지 다듬으면서 백인`-`흑인 선수들에 대한 신체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렇듯 나날이 성장한 박찬호가 올 시즌에서 한 단계 도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재(5월19일)까지의 성적은 4승4패지만 승수를 챙기지 못한 경기에서의 피칭 역시 내용 면에서는 매우 우수하다. 필자가 보기에 이 모든 변화의 키워드는 단연 ‘자신감’이다. 사실 박찬호의 변화 조짐은 지난해 말부터 서서히 나타났다.



    그동안 그의 최대 약점은 과도한 사사구와 왼손타자에 대한 콤플렉스였다. 스피드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을 구사하는 박찬호지만 컨트롤 면에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의 문제는 투구 때의 균형과 릴리스 포인트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투구 동작 전체에 일관된 리듬이 살아나면서 이 부분이 안정되어 간다는 점이 상당히 긍정적이다.

    기록상으로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이번 시즌에서 박찬호는 5월21일 현재 65.2이닝을 던졌다. 이 가운데 사사구는 29개(한 이닝 평균 0.44개). 2000년 226이닝 동안 136개(0.6개), 1999년 194.1이닝 동안 114개(0.58개)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25% 이상 감소한 수치다. 볼 컨트롤이 안정되어 간다는 분석이 가능하다(‘표’ 참조).

    이러한 볼 컨트롤의 안정은 투구 동작의 개선에 힘입은 바 크다. 발을 높게 차 올리는 것으로 유명한 박찬호의 투구 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올 시즌 발 끝 방향의 미세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와인드 업 모션에서 들어올린 왼쪽 발 끝이 2루로 살짝 돌아간 것이 정확히 3루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의 스피드는 다소 줄어들지만 정확성은 눈에 띄게 달라진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투구 폼을 향해 개선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왼손 타자에 대한 콤플렉스 역시 상당 부분 극복되었다. 왼손 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때면 스트라이크 존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던 박찬호는 최근 자신감 있게 코너워크를 구사하고 있다. 아웃 코스 구석구석에 공을 찔러 넣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감이 부족할 때 흔히 생기기 쉬운 가운데 쏠림 현상이 없어지면서 왼손 타자에 대한 피홈런`-` 피안타 역시 상당히 줄어들었다.

    반면 주의해야 할 점은 얼마 전 시카고컵스와의 경기에서 발생한 허리 부상의 가능성이다. 박찬호의 투구를 유심히 지켜보면 그의 투구 동작은 미국 투수들과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미국 투수들이 팔과 어깨에 크게 의존하는 데 비해 박찬호는 하체와 허리를 많이 이용한다. 원래 투수가 허리를 많이 쓰는 포지션이기도 하지만 박찬호 같은 투구 동작의 소유자는 허리와 하체의 힘이야말로 강속구의 원천이기 때문에 이 부위 부상에 대한 보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야구장 안팎에서 이처럼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을 보이는 박찬호의 향후 행보는 어떻게 될까. 5월 중순 현재 4승 4패인 점을 감안하면 올 시즌 박찬호는 15~18승 정도가 예상된다. 그가 아무리 잘 던진다 해도 부진한 다저스팀 공격력을 감안하면 20승은 아무래도 버겁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승수보다는 오히려 방어율에 주목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특급 선발투수 요건인 2.50대 이하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인지 하는 부분이다. 만일 방어율이 2.50 이하만 되면 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를 것이 확실하다.

    고질적인 문제인 제구력 불안과 홈런 허용이 부쩍 줄어든 현재의 기조가 흐트러지지 않고 지속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2.50의 방어율은 기대할 만하다. 이제 나름대로 투수로서의 감을 잡아가고 있으므로 부상만 조심한다면 해마다 15승대를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메이저리그의 일본인 투수 노모가 한창 잘 나간 96년에 신시내티 레즈의 슈퍼스타인 배리 라킨이 “지금은 노모가 좋지만 2~3년 후엔 박찬호가 훨씬 나을 것이다”고 예언한 바도 있지만 많은 메이저리그 스타들은 지금 그의 구위를 인정하고 있다. 올해 스프링캠프에서 만난 배리 본스, 제프 켄트, 제프 젠킨스 등도 이구동성으로 ‘박찬호의 빠른 볼은 정말 위력적이고 커브 볼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하곤 한다.

    그가 올 시즌 후 자유계약 선수가 된다는 점에서 향후 움직임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분명한 것은 벌써 투수 최고 연봉인 2000만달러가 언급될 정도니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최초의 동양인 선수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전망이다. 일본의 노모, 사사키, 이라부, 요시이, 하세가와 등을 모두 동원해도 못 미칠 정도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우뚝 선 박찬호. 그의 이번 시즌은 그래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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