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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들, 치열하게 살았구나

교과서에서 볼 수 없던 ‘20세기 여성 사건사’… 억압-굴종 온몸으로 저항하며 어려움 극복

  • < 정리·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우리 할머니들, 치열하게 살았구나

우리 할머니들, 치열하게 살았구나
1922년 6월, 서대문 안 정측강습소에 머리카락을 자르고 남장을 한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남자들과 함께 공부하겠다는 것이었다. 단발의 주인공은 강향난. 한남 권번 기생 출신으로 후에 강석자로 개명했다. 강향난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남장만 한 게 아니라 당시 신여성들 사이에 유행한 ‘자유연애’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기생시절 부유한 청년문사와 사랑에 빠졌고 그의 도움으로 기생생활을 청산한 뒤 1921년 9월 배화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강향난은 1년이 안 되어 학자금을 대던 애인과 헤어지면서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대신 머리카락을 자른 뒤 정측강습소를 찾아갔다. 훗날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강석자로 변모한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운동조직 ‘근우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남자처럼 살고 싶다

강향난의 단발은 “남자처럼 살아보겠다”(동아일보 1922년 6월24일자)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여성 단발을 보는 남성들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1925년 ‘신여성’ 6월호에 화장대 앞에 앉아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여성을 한껏 비아냥거린 그림이 실렸다. 설명에는 ‘시골 여학생이 서울에 오면 공부보다 먼저 배우는 것이 치마 잘라 입기, 앞머리 자르기, 굽 높은 구두 신고 걷기, 편지쓰기’라고 되어 있다. 남성에게 단발은 개화와 근대화의 상징이었지만, 여성의 단발은 좋은 전통을 파괴하는 위험한 행위로 인식하는 이중적 잣대를 적용한 것이다.

1886년 최초의 근대적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설립된 후 ‘배운 여성’들은 계속 늘어났다. 이들은 ‘여성해방의 길은 오직 경제적 독립에 있다. 먼저 남자에게 빌붙는 성질을 없이 하라’고 외쳤다(화신상회 여사무원 최기영 ‘여성해방은 경제로부터’ 1932년 동광 1월호). 당대 여성해방론자로 꼽힌 이광수도 “혼인하려는 남녀의 자격 하나는 각각 확실한 직업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운 여성들에게 허용되는 직업이란 “가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로 제한했고, ‘할로 걸’로 불린 전화 교환수나 차장인 ‘버스 걸’, ‘데파트 걸’ ‘숍 걸’로 불린 여점원, 생산현장의 여공이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여성의 사회 진출과 동시에 직장 내 스캔들도 잦았다. 일단 스캔들이 터지면 여성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 때문에 여성들은 더욱 고통받았다. 처녀의 몸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에 시달리던 송계월 기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다 지쳐 죽기도 했다(송계월 ‘부인기자의 일기’ 신동아 1932년 11월호, 송정덕 ‘언니를 영원의 길로 보내며’ 신여성 1933년 7월호).

1927년 1월 ‘장한’(長恨)이라는 기생잡지가 창간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발행인은 김보패. 기생들이 만든 기생잡지는 뜻밖에도 창간사에서 “기생은 사회에 해독을 끼치고 기생 자신에게도 참담한 말로를 짓게 하므로 기생제도를 어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현실적으로 폐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춘부가 아닌 예술인으로서 기생의 역할을 되찾자는 주장을 편다.

“재능은 팔되 몸은 팔지 않는다”는 조선 기생들의 자존심을 위협한 것은 일본인 거류지 중심으로 이뤄진 유곽이었다. 유곽은 성 매매만을 위한 곳으로 기생이 아닌 창기가 있었다. 일본군인들이 성병에 걸려 전력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창기들의 ‘품질관리’를 위해 1916년 경무총감부령 ‘대좌부창기취체규칙’을 발포했다. 이 땅에서 공창제가 시작된 것이다. 전차금이라 하는 몸값 때문에 노예나 다름없던 당시 창기들은 1931년 4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동맹파업을 벌였다. 포주의 강간, 사기, 불법감금, 구타를 견디다 못해 단발을 하고 단식에 들어간 창기 11명은 “우리는 절대 해방하지 않으면 죽음으로 대항하겠다”고 절규했다. 그러나 일본이 만든 공창제는 이후 일본군의 ‘위안’과 성병관리를 위해 조직한 ‘위안부’ 문제로 이어진다.

●을밀대 투쟁의 주인공 강주룡

한편 1930년대는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시기였다. 1920년경 평양지역은 값싼 여성인력을 토대로 고무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나 세계적인 공황을 맞자 임금인하로 공장을 유지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노동자들은 1930년 8월 총궐기했다. 평양 총파업에 참가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은 이듬해 공장 쪽의 느닷없는 임금인하 통고에 반발, 을밀대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였다. 1931년 5월29일 평양의 자랑인 정자 을밀대 위에서 강주룡은 9시간 동안 이렇게 외쳤다.

“평양의 2300여 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해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 아는 것 중 대중을 위하여 죽는 것이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승리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로 파업을 하면서 두 차례 체포된 강주룡은 이듬해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죽는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 노동운동의 물꼬를 튼 여성 노동자들은 파업 때마다 현장을 지키며 노동운동의 지평을 넓혀갔다.

193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연애사건으로 1931년 동성연애 철도자살 사건과 “정조는 취미다”라고 외친 화가 나혜석의 ‘이혼고백장’ 사건을 들 수 있다. 나혜석 사건은 널리 알려졌으므로 동성연애 철도자살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자.

1931년 4월8일 오후 서울 영등포역. 철로 위를 다정하게 걷던 두 명의 여성이 영등포역을 향해 달려오는 기관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 처참한 현장에는 함께 찍은 사진 1장이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홍석후의 딸 홍옥임(21), 다른 이는 종로 덕흥서림 주인 김동진의 딸 김용주였다. 당시 이화여전 음악과에 다닌 홍옥임(홍난파의 조카)은 친구 김용주와 ‘서로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동성애인’ 사이였고, 김용주가 부모의 강권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하기 싫은 결혼을 한 것을 동정하다 끝내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대에는 동성연애를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때 경험하는 것으로 취급했다는 사실이다. 당대 기자와 의사 등 여류 명망가들은 지면을 통해 기꺼이 자신의 동성연애담을 소개했다. 이 무렵 조선사회는 동성연애를 이성애의 ‘안전한 훈련장’쯤으로 여기고 변태적 성욕에만 빠지지 않으면 괜찮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여성들의 동성연애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아픔을 감싸주려는 데서 시작해 일종의 동지적 연대의식을 형성케 했다. 1932년 6월 ‘여인’ 창간호에는 남편의 무관심 속에 오랫동안 독수공방한 두 여성이 연애 끝에 정식으로 결혼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동성의 신랑 신부가 조선식으로 예복을 입고 요리점에서 식을 올렸다는 내용은 눈요깃거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여성의 동성연애는 가부장적 사회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고 해소하는 기능을 대신한 것이다.

치열했던 여성들의 1930년대는 생존이 지상 목표인 전쟁시기를 거쳐 50년대 ‘자유부인’ 논쟁으로 이어진다. 여성사 연구모임 ‘길밖세상’이 펴낸 ‘20세기 여성 사건사’는 오늘날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여성운동을 정리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주간동아 2001.05.31 286호 (p74~75)

< 정리·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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