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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기획|‘지는 아이’로 키우자

이기는 법만 배운아이 남 생각할 줄 모른다

“내 자녀만은~” 욕심 금물… 모든 것 천천히 가르쳐라

  •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

이기는 법만 배운아이 남 생각할 줄 모른다

이기는 법만 배운아이 남 생각할 줄 모른다
지난 90년대 중반 한 분유회사가 ‘내 아이는 다르다’는 광고로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당시 한창 뜨고 있는 미시족을 내세워 “내 아이는 다르게 키우고 싶다”는 욕구를 부추긴 것이 주효했다. 이 광고는 소비자들이 뽑은 그 해(94년) ‘가장 인상 깊은 광고’로 뽑혔고, 해당 제품의 매출신장에도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유아-아동복 시장의 고급화 바람도 부추겼다.

반면 일부 의식 있는 부모들 사이에서는 ‘큰일날 광고’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95년 ‘좋은 아버지상’을 수상한 한국자녀교육상담소 정송 소장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눈을 감고 관 속에 들어갈 때도 남이 넣어주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은 더불어 살아야지요. 마를 대로 마른 아이들 교육을 더욱 부채질하는 광고”라며 불매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고 비난했다. 천리안 주부동호회는 “가족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광고”라며 분유회사에 공개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다.

걱정대로 “내 아이만은 다르게”라는 욕망은 공공연하게 ‘남보다 우월함’을 내세우는 왕자병-공주병 신드롬으로 이어졌다. 96년에는 여기저기서 왕자병-공주병 환자들(정신과적으로 자기애적 신경장애라 한다)이 외치는 “미나공(미안해 나 공주야)”이 들려왔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IMF 위기가 아니었다면 자기사랑의 극치인 공주병은 좀더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외환위기 상황에서 공주병이 후퇴한 대신, 잠복기를 거쳐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되자 이번에는 영재 신드롬이 찾아왔다.

2002년 3월 ‘영재교육진흥법’ 발효를 앞두고 이제 너도나도 영재 테스트를 받느라 야단이다. 덕분에 요즘은 영재 아니면 둔재라는 식의 이분법이 지배한다. 이에 대해 서울대 이순형 교수(소비자아동학과)는 “천재 환상에 젖은 부모들이 자녀를 천재로 만들려고 애쓰지만 적응문제아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재 신드롬의 기저에는 결국 다르게 키우고 싶다는 부모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모든 아이들이 왕자요, 공주며 영재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다를 게 없는데다, 이런 영재열풍이 조기교육의 사생아들만 양산한다는 것이다.



“병원을 찾아오는 엄마들 중 첫마디가 ‘우리 애는 세 살 때 글을 뗐고요’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왜 찾아오셨나요’라고 물으면 ‘언어 이해력이 떨어져요’ 하는 거예요. 아이에게 너무 일찍 글자 외우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아이가 생각은 안하고 그냥 통째로 외워버린 겁니다.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이라면 왜 저렇게 생겼을까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데,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글자를 가르치면 아이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른이 원하는 정답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죠. ‘선생님, 얘는 책을 보자마자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 얘는 안 가르쳐 줬는데도 알파벳을 다 외워요.’ 부모는 자랑스럽게 이런 말을 하지만, 듣는 저는 ‘오죽 재미있는 일이 없으면 애가 책만 읽을까’ ‘부모가 얼마나 닦달했으면 외우기 선수가 되었을까’라고 자폐증을 걱정하죠”(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

이처럼 온 나라가 왕자병-공주병에, 영재병까지 앓는 마당에 한국수양부모협회(회장 박영숙)가 추진하는 ‘지는 아이로 키우기’ 운동은 상식을 뒤집는 신선한 발상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기는 법만 배운아이 남 생각할 줄 모른다
호주대사관 문화공보관인 박영숙씨(46)는 13년 전 미국인 함슨 씨와 결혼해 아들 숀을 임신했을 때 시어머니가 들려준 태교법을 잊을 수가 없다. 임신 5개월째 접어들자 미국인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얘야, 불쌍한 사람들,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 사람들, 나병환자처럼 불치의 병을 앓는 사람을 많이 만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해라. 그래야 감성이 풍부한 아이가 태어난단다.”

임신하면 예쁜 아이 사진을 벽에 도배하고 그것만 쳐다보고, 좋은 음악 좋은 이야기만 들으며, 과일도 모양 좋은 것만 골라 먹는 우리식 태교법과는 완전히 달랐다. 뱃속의 내 아이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라는 이야기도 귀에 새로웠다.

박영숙씨는 태교로 그치지 않고 95년부터 외둥이로 자라는 아들 숀을 위해 위탁모를 자청했다. 3년 뒤인 98년에는 아예 수양부모협회를 발족해 본격적으로 남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한국수양부모협회는 2년여 동안 250여 명의 아이를 키웠고, 현재 37가정에서 48명의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한국수양부모협회가 벌이는 ‘지는 아이로 키우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에게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 아이들 역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특정한 지위에 오르거나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 훌륭한 사람으로 꼽지는 않는다. 훌륭한 사람이란 남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이다.

남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은 남에게 지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박씨는 지는 데 익숙한 아이, 져도 스트레스 받지 않는 아이, 지면서 또 남을 이해하는 아이가 진정으로 남을 위하고 회사를 위하며 사회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아이로 자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처럼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남에게 이기는 법을 뱃속에서 터득하고 나온다. 이기는 기질은 타고난 것이기에 어떻게 남을 따돌리고 이겨야 하는지를 가르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누구도 남에게 지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씨는 가정에서 일부러 지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씨의 논리는 단단한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외국에서는 부모에게 “자식을 어떤 사람으로 키우고 싶으냐”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라 하는 반면 한국 사람들은 겉으로는 겸손하게 “자기 밥벌이나 하면 되지”라고 말하면서 내심 의사, 판-검사 되기를 바란다. 솔직히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 세속적 성공을 원하는 사람에게 지는 아이로 키우자는 말은 먼 산의 메아리일 뿐이었다. 이기기도 바쁜데 지면서 언제 성공할 수 있으랴. 안타깝게도 세상은 더욱 열심히 아이들에게 이기는 법만 가르쳤다.

‘리더로 키우려면 말부터 가르쳐라’의 저자 이정숙씨(스피치컨설턴트)는 “요즘 교육은 적게 낳아 잘 기르자가 아니라 적게 낳아 기 살려주자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렇게 기가 산 아이들은 아예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나만을 생각하거나 밖에 나가서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믿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씨는 그럴수록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도록 하라”고 충고한다.

이기는 법만 배운아이 남 생각할 줄 모른다
실제 몇 년 전 일본 총무청이 일본 미국 한국의 학부모를 대상으로 ‘학부모 의식’을 비교 조사한 결과를 보면 재미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의 자녀가 장래 어떤 성격을 가진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가’라는 항목에 일본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 미국은 책임감, 한국은 예의 바른 사람을 꼽았다. 그러나 정작 가정에서 예절을 가르칠 의사가 별로 없음이 다음 질문에 대한 답에서 드러난다. ‘자녀가 어릴 때는 자유롭게 키우고, 커감에 따라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미국은 100명 중 8명만 동조한 반면, 한국은 100명 중 81명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일본의 경우는 39명이 긍정, 61명이 반대했다. 한마디로 한국의 가정교육은 어릴 때는 ‘오냐오냐’(과잉보호)하다가 커서는 ‘안 돼’(과잉간섭)로 바뀐다.

가정에서 포기한 일을 학교에 요구하는 것도 무리다. 서울 압구정동 구정고 김진성 교장은 “미국과 일본의 학부모들은 학교란 기초 학력을 배양하고 진학이나 취업 준비를 위한 곳이라 생각하는 반면, 한국의 학부모들은 가정에서 해야 할 기본예절, 규칙 지키기, 인간성 육성 등 인성교육과 생활지도까지 학교에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우리 나라 부모들에 팽배한 내 아이 기 살리기 교육은 버릇없고 이기적인 아이로 키울 뿐 아니라, 심지어 폭력적인 아이를 만들기도 한다. 정송 소장은 “부모들은 한결같이 아이를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믿는데 그 믿음이 폭력사회를 만든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이웃 중에 아이가 맞고 들어오면 “아니, 또 맞고 들어왔어? 치료비 물어줘도 좋으니 너도 한번 때려봐. 이 녀석아!” 하고 아이를 닦달하는 부모가 있었다. 그 후로도 또 맞고 들어오자 아예 태권도학원을 다니게 하며 “너도 태권도 배워 다른 애가 때리면 실컷 두들겨 패!”라고 가르쳤다. 아이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맞고 들어올 때보다 때리고 들어오는 횟수가 늘어났고, 부모는 치료비를 물어주더라도 맞고 들어오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힘만 믿고 친구들 돈을 빼앗고 패싸움을 벌였다. 주먹을 휘둘러서라도 남을 이기라고 가르친 부모는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전쟁터에 나가 이기고 돌아오는 식의 ‘호전적 교육’에서 벗어나 남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키우자는 게 ‘지는 아이’의 개념이다. ‘지는 아이로 키우기’의 1단계가 ‘느리게’ 키우는 것이다. 다른 아이보다 앞서야 하고, 적어도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부모의 조바심만 버리면 옆집 아이가 한글을 뗐다는 소리에도 초연할 수 있다.

연세대 의대 신의진 교수(소아정신과)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거나 버릇 나쁜 구석이 보여도 절대 서두르지 않는 전통육아법인 ‘기다림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라고 말한다. 일본 요코하마시 서부병원 주산기센터 임상심리의인 하시모토 요코 씨도 “자녀교육을 ‘좀더, 좀더’에서 뺄셈의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양가 높은 것을 너무 많이 먹이면 아이는 비만이나 성인병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다. 조기교육도 마찬가지다.

공동육아연구원에서 현장교육전문가로 일하는 이부미씨는 “젊은 부모들의 기대치가 아이의 생물학적 성장보다 꼭 한 단계씩 빠른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부모들은 한결같이 “영재로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적어도 남들보다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불안해서 조기교육을 시킨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는 부모들의 그런 불안감을 부추겨 끊임없이 교육상품을 소비하게 한다.

14세, 7세 두 아이의 어머니인 김정희씨(공동육아원 부원장)는 20개월 된 아이가 한글을 읽고 “엄마, 청와대가 어디야?” 하고 질문하는 한 학습지 광고를 보며 기분이 나빴다고 말한다. “20개월짜리가 벌써 ‘권력의 정상을 아는 아이’ 그러니까 다른 아이들은 딸랑이나 갖고 놀며 겨우 ‘엄마’ 소리를 내뱉었을 때 이미 최정상을 향한 성공의 사닥다리를 오르기 시작했으니 어느 누가 그 아이를 앞지를 수 있겠느냐는 발상이 기가 막힐 뿐”이라고. 그러나 김정희씨는 초연했다. 둘째 정석이가 초등학교 입학 직전까지 한글을 깨치지 못했지만 아이가 글자에 흥미를 느낄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요즘 정석이는 남들보다 늦게 읽기 쓰기를 배우느라 힘겨워한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애들이 놀려. 쉬는 시간에도 글씨 쓴다고”라고 하면 김씨는 “자기들이 좀 일찍 쓴다고 잘난 척하는구나. 졸자들이네, 너도 만약 짝이 글씨 좀 늦게 쓰면 놀릴 거니? 넌 실컷 놀다 학교 들어가서 글씨를 조금 늦게 쓰는 거고, 그 애들은 너만큼 놀지 못하고 공부를 많이 해왔으니까 빨리 쓰는 거야”라고 격려해 준다. 아이는 엄마의 격려에 힘을 얻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까지 배운다.

정석이는 일찍 글쓰기를 익힌 아이들보다 글자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집중력이 좋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몇 년에 걸쳐 배울 것을 2개월 정도에 뗐다. 이제 학교에서 받아쓰기를 하면 90점 정도 받아오니 남들처럼 일찍 글자 가르치지 않은 것을 후회할 필요도 없다. 김씨는 20개월도 안 된 아이에게 온갖 학습지를 강요하며 조기교육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학대”라고 말한다.

김씨와 비슷한 교육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지난 94년부터 ‘공동육아조합’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공동육아는 뜻이 맞는 부모들이 조합을 결성하고 조합이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것으로 전국에 30곳이 운영중이다. 여기서는 억지로 학습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놀며 배우는 것을 중시한다. 이부미씨는 “공동육아 교육의 의미는 우리 아이가 얼마나 똑똑해지냐에 있지 않고 건강하게 남과 더불어 잘 살 수 있는가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는 여럿이 함께 ‘느리게 키우기’를 실천하며 무리한 조기교육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쓴 스티븐 코비는 ‘나도 이기고, 상대방도 이기는 승-승적 사고’와 ‘나는 이기고 상대방은 지는 승-패적 사고’의 차이를 ‘풍요의 심리’와 ‘부족의 심리’로 설명했다. 풍요의 심리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이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패러다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생을 경쟁의 장이 아닌 협력의 장으로 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족의 심리에 빠져 있다. 인생이란 모든 것이 남아돌지 않는 생활이어서 만일 누군가 큰 파이조각을 얻으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 덜 갖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인관계의 진정한 승리는 승-승적 사고에서 나온다. 첫번째 단계가 문제를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상대방의 욕구와 관심을 이해하려 애쓰고, 또 그렇게 자기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지고도 이긴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주간동아 2001.05.31 286호 (p62~65)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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