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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장물의약품 판치는 ‘블랙마켓’

비아그라-제니칼 등 고가 전문의약품 거리낌없이 거래… “일부 약사들도 가담”

  •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

장물의약품 판치는 ‘블랙마켓’

장물의약품 판치는 ‘블랙마켓’
지난 5월17일 오전 서울 남대문시장 지하 수입품 판매점. 40대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한 업주에게 다가간다. “제니 있어요.” 암호 같은 말을 건넨 그녀는 업주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다 구석에 있는 청년과 뭔가를 이야기한다. 그리곤 돈을 주고받은 뒤, 그녀는 청년이 건네준 봉투를 들고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청년이 판 물건은 최근 비만여성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비만 치료제 제니칼. 반드시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전문의약품이 아무 거리낌 없이 시장통에서 유통되는 것이다.

“밀수품이 아닙니다. 약국에서 나온 진품입니다.” 이 청년에 따르면 약국에서 10~11만원에 거래하는 약품이 3~4만원 싼 7만원에 팔리고 있는 것. 청년은 유난히 밀수품이 아니라는 말을 강조했다. 제약사의 약국 공급가인 8만8천원(84캡슐들이)보다 더 싼 가격이었다.

의약분업 이후 공공연한 비밀

장물의약품 판치는 ‘블랙마켓’
이처럼 서울지역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청계천 도깨비 시장 등 각 시장을 중심으로 ‘장물의약품’의 전국적 블랙마켓(음성거래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지난해 7월 의약분업 이후 반드시 처방전이 있어야 전문의약품을 팔 수 있게 되자 의사의 처방전 없이, 그것도 약사가 아닌 사람들이 고가 전문의약품을 판매하는 것.



이런 약품들은 대개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나 비만 치료제 제니칼, 고혈압 치료제 노바스크 등으로 언뜻 생활의약품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사의 까다로운 처방이 필요하거나 장기처방이 불가능해 병-의원에 들를 때마다 값비싼 진료비를 치러야 하는 약품들. 비아그라와 제니칼은 보험급여 품목에서도 제외하여 약값이 모두 본인 부담금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좀더 싸게, 또는 번거로운 절차 없이 진품을 살 수 있는 블랙마켓은 사람들의 입소문 속에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밖에 ‘뱀약’이라는 비엠겔 같은 바르는 조루증 치료제는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인데도 가격이 싸기 때문인지 블랙마켓의 단골 메뉴가 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약품들이 모두 도난품인 ‘장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최근 블랙마켓에 나도는 밀수 비아그라 중 89% 이상이 가짜라는 한국화이자의 발표가 있고 난 후부터 불법 판매업자들은 약국에서 빠져나온 국산 진품만을 취급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떠들며 다니고 있다.

하지만 의약품 불법유통의 단속을 책임지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은 이에 대해 “이들이 대부분 밀수품일 가능성이 높고 밀수의약품의 블랙마켓 형성은 이미 오래된 일”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식약청은 지난 3월 말 서울 광장시장에서 50억원대 밀수품 비아그라 1만1500정을 판매한 장모씨(44)와 박모씨(68)를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식약청 의약품 관리과의 한 관계자는 “거대 판매책(일명 스토커) 10여 명이 전문의약품을 밀수해 점조직을 통해 판매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를 추적중이지만, 국산의약품을 이 조직이 판매할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취재 결과 남대문과 동대문 등 각 시장에서 판매하는 이런 의약품들은 일반 약국에서 판매하는 것과 똑같이 한글이 쓰여 있는 국내 생산품으로 확인되었다. 지난 5월14일 동대문시장에서 만난 업자 ‘이사장’(그는 자신이 동대문시장에서 그렇게 불린다고 했다)이 보여준 비아그라 제품의 포장은 한국화이자가 생산한 제품과 모양이 정확히 일치했다(사진 참조). 그는 의약품들을 보여주며 “요즘 고객들은 밀수품을 믿지 않는다. 국내에서 만든 국산 제품만을 진짜로 믿기 때문에 미국 본토산이나 중국산 등을 가리지 않고 밀수품은 인기가 없고 가격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동대문시장에서 국산 비아그라 한 알(50mg)의 가격은 8000원(약국 1만1000원), 제니칼은 7만원, 노바스크는 15만원(약국 23만원)이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약품들이 있었다. 이사장은 “희귀약품이라도 ‘운대’가 맞으면 구할 수 있지만 연락처를 알려주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며 당일 현금 판매를 고집했다. 결국 그의 말을 종합하면 이제 의약품 블랙마켓은 밀수품 시장과 국산 시장으로 뚜렷하게 양분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국산의약품들이 어떻게 블랙마켓에 흘러 들어올 수 있었을까. 의약품 도매상들은 이에 대해 최근에 일어난 약국-병원의 잇단 약품 도난사고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아직 전국적 규모의 ‘스토커’가 점조직을 거느린 상황은 아니지만 분명 전문 절도단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것. 업자들은 그 근거로 이런 고가의약품들은 판매수량이 제약회사에서 정확하게 체크하기 때문에 영업직원들이 빼돌리는 것은 원천 적으로 불가

능하고, 블 랙마켓에형성되는 약품 가격 자체가 약국 공급가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약사가 불법 판매업자들에게 공급했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들고 있다. 특히 도난품목이 대부분 블랙마켓에서 판매하는 약품들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은 블랙마켓의 국산의약품들이 ‘장물’일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라는 것.

올 들어 서울을 비롯해 의정부와 고양시 등 수도권과 대구-경북 지역, 강원도 원주시 등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약국 도난사고만 30여 건. 털린 의약품의 가격도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대에 이른다. 밤 시간에 셔터 문을 절단기로 자르고 훔친 경우도 있지만 영업시간중에 제약사 직원을 가장해 조제실에 들어가 비아그라와 제니칼 등 고가 전문의약품만 훔쳐 나온 경우도 4건이나 된다. 이런 약품은 마약성분이 들어 있는 약처럼 도난신고가 의무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건 당국은 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제약업계 등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태다. 따라서 알려지지 않은 도난사고를 모두 합치면 엄청난 수량의 의약품이 블랙마켓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최근 1000만원대의 약품을 털린 서울 강남지역의 대형 ‘문전약국’의 한 약사는 “의약분업 이후 인기가 높은 고가 전문의약품을 대량으로 구입했더니 해당 제품만 훔쳐가고 다른 것은 건드리지도 않았다”며 “분명히 의약품에 대한 정보가 해박한 의약품 전문털이범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도난사고는 병원과 제약회사에서도 일어났다. 부산시 사하구 D병원은 지난 1월 약제실에 있던 비아그라 63정을 도난당했으며, 모 제약업체 도매상은 최근 제품 운반 차량과 약품을 통째로 도난당했으나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에서도 버젓이 판매

이런 장물의약품을 판매하는 곳이 과연 재래시장뿐일까. 이미 이런 블랙마켓은 인터넷에까지 진출했다. 지난 5월11일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www.ebo.co.kr) 게시판에는 무려 200건의 비아그라 판매 광고가 실렸다. 이중 많은 것이 ‘진품 비아그라를 판매한다’는 내용이었다(그런데 지난 5월17일 다시 확인한 결과 게시판이 폐쇄되고 없었다). 한 게시물에는 ‘급하다 진품이 확실한가’라는 리플릿이 달려 있기도 했다. 심지어 서울에 사는 김모씨(30)는 최근 제주도에 사는 업자에게서 “진품 비아그라를 사라”는 e-메일까지 받았다. 최근 이 사이트에 들어가 e-메일 주소가 노출된 그에게 업자가 직접 판촉에 나선 것. 거기에는 ‘김XX’라는 자신의 이름과 조흥은행 계좌번호,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김씨는 “국산 진품이 확실하며 포장을 뜯지 않은 것을 그대로 보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자의 신분을 밝히고 국산 약품을 어디서 어떻게 공급받느냐고 묻자 “핸드폰 번호만 알 뿐 얼굴은 본 적이 없다. 다만 약국에서 나온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동대문 시장의 이사장은 “옛 조직망(밀수품 판매조직)이 그대로 쓰일 뿐 공급책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전문 절도단은 누구인지 모르지만 장물 판매책이 밀수품 판매책인 스토커들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 의약품 도매상의 증언은 더 충격적이다. “이들 점조직 중에는 도매상이나 제약업체 영업직원들도 섞여 있으며, 이들은 장물인 줄 알면서 단골약사들에게 리베이트로 이를 끼워주거나, 심지어 일부 약사들은 싼 가격에 이런 약품들을 사기 위해 물건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의약품 도매상 김모씨). 약국에서 도난당한 약품들이 블랙마켓을 거쳐 다시 약국에 헐값에 넘겨진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대해 대한약사회의 한 관계자는 “일부 소문은 들어왔지만 사실로 확인된 부분은 없다”며 “약품 도난 사실마저 숨기는데 장물을 다시 구입하는 약사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보건소 앞에서 의료보호 대상자나 노인을 상대로 혈압약을 싸게 판다고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장물아비라고 보면 됩니다. 장기투약으로 본인 부담금이 늘어났지만 돈이 없어 쩔쩔매는 극빈자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의약품 도매상 김씨의 증언은 장물의약품 블랙마켓이 이미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위험세력’으로 등장했음을 경고하고 있다.



주간동아 2001.05.31 286호 (p44~46)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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