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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믿을 정치판” 일본 국민 열받았다

‘모리 내각 불신임안’ 불발 이후 파벌정치에 대한 불신 고조

“못 믿을 정치판” 일본 국민 열받았다

“못 믿을 정치판” 일본 국민 열받았다
요즘 일본 정계의 최대 화제는 ‘불발 쿠데타’에 관한 것이다. 집권 여당인 자민당의 차세대 리더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전 간사장이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무참히 패배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가토 전 간사장은 객관적으로 모리 총리보다는 인기가 높다. 그럼에도 그는 쿠데타에서 실패함으로써 총리자리에서 멀어졌다. 왜 그럴까. 자신을 지지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93년 이후 수년간을 제외하고는 55년부터 일본을 움직여온 ‘영원한 집권당’ 자민당에서는 ‘집안 싸움’이라는 말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단어다. 파벌의 역학관계에 따라 내부적으로 총리를 정해왔기 때문.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식이다. 총리를 내는 데 있어 국민적 인기나 기대는 거의 관계가 없다.

총리가 된 뒤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아도 자민당 내 파벌이 지지하면 그 총리는 장수한다. 직접선거와 달리 내각제인 일본에서는 국회의원 수가 많은 당에서 총리를 배출하고 그중에서도 의원을 많이 거느린 파벌에서 총리를 배출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이런 체제를 바꿔보자고 뛰쳐나온 것이 바로 가토 전 간사장. 그도 중의원 45명을 거느린 자민당 내 제2파벌의 리더다. 그러나 모리 총리와는 대결하는 입장이어서 ‘비주류’라고 불릴 뿐이었다. 그는 11월10일 “국민의 75%가 신뢰하지 않는 내각을 같은 당이라고 해서 무조건 지지할 수는 없다”며 “12월로 예정된 개각을 모리 총리에게 맡기지는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일본 정계의 상식으로 봐서는 ‘폭탄선언’이었다. 그러자 많은 국민은 “그래 너 말 잘했다. 한번 바꿔봐”라는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가토 총리가 탄생한다 해도 자민당 정권임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충격요법’으로 정권을 바꿔보자는 국민의 열망은 대단했다.

그러나 그는 11월20일 야당이 낸 모리 내각 불신임안 표결 직전에 불참을 선언했다. 본회의에 참석해서 찬성표를 던지겠다던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지지세력을 모으지 못한 데다 불신임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작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다. 하지만 가토가 주저않게 된 실질적 배경은 “만약 불신임안에 찬성하면 당에서 제명하고 다음 선거에서 공천도 주지 않겠다”는 주류파의 엄포 때문이었다. 결국 가토 전 간사장은 국민의 기대만 잔뜩 부풀려 놓고 자민당에서 제명당할 것이 두려워 주류파에 백기를 든 셈이다. 이 때문에 가토 전 간사장은 “남자도 아니다” “혼자서라도 회의에 참석해 찬성표를 던졌어야 했다”는 등, 국민으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았다.

국민이 그를 비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대를 했는데 배신당했다는 것이다. 배신감의 뒤편에는 현 집권 자민당은 물론, 일본 정계 전반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이 자리잡고 있다.

아사히신문이 11월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국민 중 41%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답변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무당파(無黨派)라고 부른다. 이들 중 대부분은 현 정치에 대한 불신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조사에 따르면 모리내각의 지지율은 4월 발족 당시의 41%에서 점점 하강 곡선을 그려 11월 조사에서는 발족 이후 최저치인 18%를 기록했다. 더 이상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수준이다. 그렇지만 모리 총리는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지 않느냐”며 집권유지에 의욕을 보이고 있고 주류파도 여기에 맞장구를 치고 있다. 총리 본인이 고집을 부리고 유력파벌이 모른 체하면 국민들로서는 그를 끌어내릴 방법이 없다.

일본 국민은 이런 정치를 보면서 총리감으로 ‘엉뚱한’ 사람을 선호하고 있다. 요즘 각종 여론조사에서 최고의 총리감으로 각광받고 있는 인물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지사와 자민당의 여장부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의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시하라지사는 국회의원이 아니기 때문에 총리 직선제가 도입되지 않는 한 총리가 될 자격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나카 의원도 바른말을 잘하기 때문에 자민당 내 어느 파벌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파벌정치가 깨지지 않는 한 총리가 될 가능성은 없다. 일본 국민의 현실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감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물론 일본 정계도 나름대로 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년부터 현재의 1부 22성청을 1부 12성청으로 대폭 축소한다. 작은 정부로 효율을 기하겠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국회의원과 비서가 공무원에게 청탁이나 알선을 해주고 돈을 받는 것을 처벌하는 ‘알선이득처벌법’을 신설, 자정도 꾀하고 있다. “정치권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으니 너무 미워하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대국민 하소연인 셈.

하지만 그 어떤 노력에도 정-관-재계가 먹이사슬처럼 얽혀 상부상조하는 일본정치의 본질은 바뀐 게 없다. 이를 ‘철의 3각구조’라고 부를 정도. ‘족의원’(族議員)은 그런 구조 속에서 태어난다. 족의원은 한 상임위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관계나 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의원을 말한다. 방위족 문교족 농수산족 운수족 등으로 불리는 의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못 믿을 정치판” 일본 국민 열받았다
이같은 부패구조가 고착화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여야간 정권교체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계속해서 정권을 잡고 있으니 유권자인 국민을 무서워할 리가 없다.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수(數)의 정치’다. 현재 집권 자민당은 정책 정강이 별로 맞지도 않는 공명당까지 끌어들여 수의 논리로서 정치를 주무르고 있다. 그렇다고 국민이 정치에 대한 불만을 조직적으로 표시하려는 경향도 없다. 정치가 아무리 엉망이라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것. 일본의 유권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얌전한 유권자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본만큼 정치하기 쉬운 곳도 없다는 말도 나온다.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6월의 중의원 선거에서 한국의 낙선운동에서 배워온 방법으로 특정 후보를 떨어뜨리려고 노력했다.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의 정치풍토에서는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를 주도했던 시민단체들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고 자부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유권자들의 의식이 아직은 시민단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요즘 일본의 유권자들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 속속 증명되고 있다. 10월15일 나가노(長野)현 지사선거에서 소설가인 다나카 야스오(田中康夫) 후보가 부지사 출신을 누르고 당선됐다. 그는 조직도 없이 자원봉사자들의 ‘풀뿌리 선거운동’으로 40여년간 지속돼온 ‘부지사 출신이 지사가 된다’는 전통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일주일 후인 22일 도쿄의 한 선거구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도 여성 시민운동가인 무소속 가와다 에쓰코(川田悅子)후보가 정당 공천을 받은 3명의 쟁쟁한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가와다씨도 다나카씨와 마찬가지로 자원봉사자만으로 선거를 치렀다.

이 때문에 일본 정계에서는 내년 7월 경 치러질 참의원 선거를 주목하고 있다. 기존정당에 대한 불신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이 아니냐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 만약 그런 일이 정말로 벌어진다면 일본 정치는 한 단계 진전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실제로 얼마만큼의 변화가 일어날지는 미지수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무당파’가 열쇠를 쥐고 있다는 분석이 많았지만 ‘무당파’가 선거에 참여하는 비율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무관심’이 오늘의 일본 정치를 설명하는 키워드일 것이다.



주간동아 2000.12.14 263호 (p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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