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인터넷이 한 여고생을 짓밟고 있다

‘낙태폭행 사건’ 실명 공개 네티즌들 끝모를 공방…‘퍼온 글’ 난무 인권유린 심각

인터넷이 한 여고생을 짓밟고 있다

인터넷이 한 여고생을 짓밟고 있다
“절대 이렇게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냥 억울해서 조언을 얻으려고 한 것뿐인데….”

최근 인터넷 상에서 네티즌들의 폭발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열띤 공방을 낳고 있는 ‘여고생 낙태, 폭행 사건’의 장본인 박모양(18)은 요즘 ‘인터넷 시대’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절감하고 있다.

남자친구와의 사랑, 의도하지 않은 임신과 낙태, 그리고 폭행 사태…. 이렇게 이어지는 어느 고등학생들의 극히 사적인 이야기는, 당사자들의 실명이 공개되면서 네티즌들에 의해 ‘마음껏’ 윤색되고 희화화되며 인권 말살의 ‘비극’이 돼버렸다. 네티즌들의 ‘언어 폭력’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며 고통의 날들을 인내하고 있는 이들은 인터넷의 익명성으로 인해 인권이 유린된 또 하나의 희생양이다.

인천 A여고 3학년인 박양이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0월8일께 그녀의 남자친구 고모군(18)이 재학중인 인천 B고교 홈페이지에 박양과 관련한 폭로 게시물이 게재되면서부터. 지난 9월10일 고군의 집 앞에서 벌어진 폭행사건에 대해 기술한 이 글은 어디에선가 옮겨온 글이었지만, 고군의 이름은 물론 소속학교와 반, 누나와 이모의 이름과 직업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었다.

“낙태수술을 한 다음날 남자친구의 집에 갔더니, 문도 안 열어주고, 더러운 년이 와서 행패냐는 식이었습니다. 배신감에 그에게 욕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때렸습니다. 저는 저항할 수도 없었습니다… 남자친구 누나가 더러운 년이라고 욕을 하기에 참을 수 없어 나도 욕을 했더니 남자친구는 어저께 낙태수술을 한 저의 배와 얼굴을 때렸습니다. 동네 창피하다고 누나는 저의 머리채를 잡고 외진 곳으로 끌고갔습니다… 몸부림을 쳤는지 누나 얼굴에 상처가 났고, 그의 이모와 남자친구가 저를 눕혀놓고 막말로 복날에 개 잡듯이 때렸습니다. 갑자기 배가 아팠고 그만 때리라고 애원했는데 아랑곳없이 계속 때렸습니다… 비참했습니다. 두번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가버렸고, 저는 쓰러져 119에 실려갔습니다. 세 차례 병원을 옮겨다니고선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박양의 글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고막 파열에 귀와 머리를 이어주는 말초신경이 망가져 있는 상태였습니다…그런데 (남자친구) 누나 눈에 상처 난 것을 미끼로 검찰에 진단서를 올려 현재는 맞고소 상태입니다… 도와주세요….”

박양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남자친구와 집안 사람들의 이름을 공개했고, 이후 고군의 학교 홈페이지에는 고군을 비난하는 네티즌의 글들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사실확인이나 실체적 진실 파악을 거치지 않고 네티즌들은 ‘파렴치한 ×에게’ ‘인간 이하의 ××’ 등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비난을 고군에게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난무하는 비방에 견디다 못한 고군의 학교는 지난 10월23일 결국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원색적 비방 학교 홈페이지 폐쇄

그러나 이번에는 박양 학교의 홈페이지와 여성전용 사이트 등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 박양의 신상을 공개하는 게시물이 등장하면서 파장은 또 다른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박양 편과 고군 편으로 나뉜 네티즌들의 본격적인 난타전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 고군의 사정을 잘 아는 친구가 올린 것으로 보이는 이 게시물은 박양의 신상 공개 외에는 신빙성이 없는 원색적 비방만으로 가득 차 있다.

“전 박××의 첫번째 제물이었습니다… 그녀는 A여고 조직체 ‘배고파’의 회장입니다. 자기가 배고플 때 남자 울궈먹고 간이며 쓸개며 다 빼먹고 다닙니다. 고××가 불쌍하기만 합니다… 나도 당했습니다. 여러분 박××는 정말 믿지 마세요. A여고 학생들도 알 겁니다. 전문적인 ‘꽃뱀’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결혼을 전제로 사귄다는 것을. 만날 때마다 하니깐요… A학교에서 인정한 KS마크 걸×입니다. 이런 나쁜 말을 남용해서 미안합니다. 정말, 생각하면 죽이고 싶습니다. 전 완전히 집에서 매장당했구요. 부모님은 아들 취급도 안 해요….”

이 글이 올라오자 이번에는 박양의 학교 홈페이지가 네티즌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한 후 폐쇄됐다. 양교 학생들 사이에 공방이 가열되고 있을 즈음, 유명 인터넷 사이트와 인터넷 미디어 사이트에는 박양 사건과 관련한 토론방이 속속 생겨나 매일 수백명의 토론자들이 사건의 진실과는 관계없는 헛된 비난 공방에 열을 올렸다. 각 사이트에 게재된 박양과 고군 관련 게시물은 연일 수천건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군의 누나가 재학중인 대학의 학과 홈페이지는 비난 게시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아예 접속이 안 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교육부와 인천 시교육청, 심지어 청와대 신문고 사이트 게시판에까지 ‘퍼온 글’들이 난무하면서 고군 학교의 학생부는 상부에 상황보고하느라 정신 못 차릴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충격적이고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박양과 고군을 사칭해 각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근거 없는 게시물을 올리는 네티즌들. ‘충격 여고생의 낙태 보고서’ ‘개패듯 맞은 낙태 여고생’ ‘쇼킹 고발 여고생의 낙태일기’ ‘여고생의 진실 2탄’ 등 이번 사건을 단순한 ‘흥밋거리’로 왜곡한 글들이 웹을 ‘쓰레기 하치장’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심지어 박양의 담임선생님이 네티즌들에게 올린 ‘자제 호소문’까지 ‘충격 고백! 박양 담임이 밝히는 사건의 진상’이란 이름으로, 내용도 각색해 다른 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려버렸다. 지금도 웹에서는 수십명의 가짜 박양과 고군이 자신이 진짜임을 강조하며 각 사이트의 게시판을 더럽히고 있는 중이다.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네티즌들의 ‘거짓말’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두 학생 집안의 감정적인 반목도 더욱 심해지고 있다. 고군의 어머니는 “우리는 단 한번도 인터넷에 글을 올린 적이 없으며, 인터넷 상의 해명글조차 네티즌들의 흥밋거리로 이용될 것이라는 학교측의 입장에 따라 한번도 대응한 적이 없는데 박양 측에서 계속 거짓글을 올리고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학교 권모 선생님도 “고군 이름으로 쓰인 모든 글들이 실제 고군의 글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며 “박양이 사건 당일 5명의 친구들을 데려와 협박했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가짜 고군의 게시물들은 고군 집안에서도 부정하는 내용”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들은 고군이 폭행 부분을 제외한 여자친구의 임신과 낙태는 모두 인정하며 후회하고 있다고 전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린 박양측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다. 학교에 제출한 자술서에서 박양은 “퇴원한 뒤 너무 억울한 나머지 인천의 이기문 변호사 법률상담 사이트와 서울 종암경찰서 김강자 서장 사이트에 조언을 얻고자 글을 올린 뒤 다른 글을 올린 것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 학교 학생부장 김모 선생님은 “상담을 하려고 올린 글이 조작돼 다른 게시판에 옮겨진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학교 선생님들에 의하면 박양이 처음 쓴 상담글에는 ‘다른 곳에도 복사해서 이 글 좀 올려주세요’란 말이 없었다는 것.

이기문 변호사는 “10월 초 박양이 올린 상담 요청 게시물에 답장을 보내줬고, 당시 게시물이 삭제돼 없지만 ‘복사해서 다른 곳에 글을 올려달라’는 말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이변호사는 “박양이 메일로 상담을 요청한 게 아니라 보안성이 없는 게시판 상담을 요청해와 이런 결과가 벌어졌다”며 “사건 내용의 진실 여부를 떠나 상담한 여학생이 인터넷에서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괴롭다”고 토로했다. 이변호사는 이후 자신의 사이트에, 더 이상 박양과 관련한 게시물을 인터넷에 올리지 말 것을 부탁하는 호소문을 3회나 올렸다.

김강자 서장의 상담 사이트에는 박양의 글이 삭제됐는지 아니면 아예 게재 자체가 안 됐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서장은 “종암경찰서 사이트에는 박양이 올린 원본은 없고, 단지 퍼온 글만 있는 실정이며, 타 경찰서에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 대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발 좀 이제는 가만히 놓아두세요. 사건의 진실은 법정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수학능력시험도 며칠 안 남았습니다. 인터넷에 어떤 글이 올라왔다는 소식만 들려도 애가 깜짝 놀랍니다.” 고군의 어머니는 수학능력고사를 보름 앞두고 학교로부터 ‘등교정지’ 처분을 당한 고군이 지금 극단적인 정신쇠약 상태에 빠져 있다고 전했다.

박양 어머니도 요즘 거의 하루 종일 박양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법원에서 판결이 나면 거기에 따르겠습니다. 민사소송도 걸고 싶지만 소송 기간이 길어질수록 딸애의 고통만 커지는 것 같고… 그래서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인터넷만 조용하면 딸애의 회복이 빨라질텐데….” 이미 모든 것을 알아버린 동료 학생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학교측은 박양에게 징계 대신 청소년상담소에서의 사회봉사를 시키고 있다.

“여러분은 인터넷을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로만 진실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법정에서 재판관들도 판결하기 쉽지 않은 것이 진실입니다. 네티즌들은 인터넷 상에 떠도는 비방과 헛소문에 더 이상 현혹되지 말고 이쯤에서 이번 사건을 접어둡시다. 그것이 두 학생이 거듭날 수 있도록 돕는 길입니다. 작게는 두 학생의 문제지만 더 나아가서는 우리 교육현실의 문제이자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두 학생이 이번 사건을 딛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더 이상의 돌을 던지지 말아주시길 호소합니다.” 박양의 담임선생님 부모씨(36)가 각 사이트 게시판에 ‘실명’으로 게재한 호소문에는 네티즌들의 무분별한 ‘언어 폭력’으로 인해 아예 인권 자체가 말살돼버린 제자를 구하기 위한 스승의 절박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도덕성 불감증의 아노미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일부 네티즌들에게 이런 호소가 얼마나 감화를 줄 수 있을지….





주간동아 2000.11.16 259호 (p42~44)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18

제 1218호

2019.12.13

“긴 터널 빠져나오자 우울의 고장”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