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7

2000.11.02

스물여섯가지 맛 황홀한 ‘五色’

  • 시인 송수권

    입력2005-05-17 1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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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여섯가지 맛 황홀한 ‘五色’
    우리 음식 가운데 극채색(極彩色)의 미를 띠고 나타난 것이 구절판(九折坂)과 폐백 음식이라면 간색(間色)의 미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다식(茶食)이다.

    이것들은 맛과 멋에서 볼 때 오미오색(五味五色)을 미감과 정서로 승화시킨 것이며 메시지로 볼 때는 국토 사유관(思惟觀)에서 조화를 이루는 음식이다. 다시 말하면 오방색(五方色)인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이 그것이다. 중앙색(황색)을 중심으로 한 극채색 계열과 변방의 무채색을 중심으로 한 간색 계열의 이분법적인 구별이다.

    특히 왕조사를 중심으로 한 개화기 이전까지는 금채색(禁彩色) 시대로, 신분제 하에서 색채의 사용은 엄격히 구별되었다. 단적인 예로 과실정과와 야채정과를 두고도 알 수 있다. 과실정과의 백미(白眉)편으로 산사정과 애두정과 유자정과 귤정과 등을 들 수 있고, 야채정과로는 연뿌리정과 등을 들 수 있다.

    예로부터 제주 목사의 상납품은 우황과 귤정과였다. ‘목관은 귤에 꿀을 붓는데 백성은 귤에 독을 붓는다’는 말은 제주 민요에도 있다. 이같은 갖가지 자연색을 모아 오색수정과를 만드는데, 이는 당상관 이상의 명문가에서만 허용되었다. 한말에는 이 수정과를 ‘교동수정과’라고도 했는데 당시 김좌근 김병국 김병익 대감이 교동에서 살았기 때문에 거기서 유래한다.

    구절판만 해도 그렇다. 왕조 말기엔 토산품을 1포8품으로 나타내어 구합(九合)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구합이나 구절판은 1포8품을 합한 이름이 된다. 이 구절판의 극채색을 한국 음식에서 잘 읽어낸 사람은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였다. 구절판 상자 위에 놓인 꽃 한송이(플라워록)로 뚜껑을 열자 빨간 틀 속에 아홉 가지의 극채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넋을 잃었다. 그녀가 만약 다식을 보고 간색을 읽었다면 또 한번 놀랐을 것이다.



    96년 10월1일부터 5일까지 낙안 읍성에서 열린 제2회 남도음식 축제에서도 최우수 대상을 차지한 것은 이순자씨(전남 담양군 용면 두장리·전화 061-382-2531)가 출품한 ‘추월산 약다식’ 이었다. 추월산(秋月山)에서 자생한 온갖 열매와 색과 향을 그대로 응용한 순자연식품이었다. 이씨가 주로 애용한 다식의 재료는 복분자(산딸기) 쑥 꽃사과(능금) 정금 모과 솔잎 조피 버섯 꾸지봉 구절초 으름 등 아주 다양하다.

    이 스물여섯 가지의 다식에는 추월산 한 채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올리브유나 샤프란 향이 아닌 순수한 자연향이라는 점에서, 간색을 띠고 나타난 향토정서란 점에서 대상을 받은 이유는 충분했다. 다시 말하면 소박, 검약, 절제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 음식의 선풍(仙風)이다. 이씨는 약다식의 개발 의미를 고유한 숭조정신(崇祖精神)과 자연애가 깃들인 국토 생명정신으로 설명한다. 이는 곧 화생(和生)의 공덕(功德)으로 불가와 유가의 정신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다식은 송화나 진달래, 연꽃, 국화 등이 필 때 철마다 그 재료를 수집하여 응용한다. 더구나 무공해식품이라는 강점이 있기도 하다. 음과류 중 전통식혜만은 그 입맛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신세대들도 큰 거부감 없이 캔음료로 즐겨 마시는 것을 보면, 이제 음료가 아닌 다식도 그 간색이나 향에서 입맛을 되살려놓을 가능성이 충분히 엿보인다. 이것이 민족의 염결성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예를 들자면 아가위 열매로 만든 산사정과는 씨를 없앤 다음 놋쇠솥에 아가위를 넣고 그것이 잠길 만큼 물을 부어 슬쩍 데친다. 물을 따라내고 꿀을 부어두기만 하면 산사정과가 되고, 겨울이 지나 봄까지 두어도 빛과 맛과 향이 변하지 않는다.

    음식에 스민 색채를 읽는 것도 이처럼 중요하다. 서구인의 색채 감각인 7색 무지개도 우리는 통념상 5색으로 읽는 것은 고유한 사유관이 있기 때문이다. 제 6회째를 맞는 ‘남도음식축제’가 10월23일부터 낙안읍성에서 벌어진다. 여기에 출품되는 조화로운 음식이 적잖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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