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2

2000.09.21

전통은 계속되어야 한다

  • 입력2005-06-22 1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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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은 계속되어야 한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어볼 것을 권유한다. 자전적 성격의 이 소설은 20세기 초엽 우리 민족의 삶을 담담한, 그러면서도 절제된 문체로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미륵의 작품 속에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배어 있다. 그는 독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는데,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잔잔히 흘러가는 압록강을 오래오래 돌아본다. 압록강의 물결 속에 이미륵의 회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과거, 우리 민족이 몸담고 살아온 전통도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추석 다음날, 단단히 각오를 하면서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기사가 고속도로를 피해 국도로 접어드니 모처럼 주변 산하를 찬찬히 음미하는 기회가 되었다. 나지막하게 이어져 있는 산등성이는 역시 낯익은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정다웠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차창너머로 방금 헤어진 가족들의 얼굴도 하나하나 떠올랐다.

    제사를 모신 뒤 부리나케 어머니 산소를 향해 나섰는데 평소 30분 거리가 3시간이나 걸렸다. 깜박 졸다가 눈을 떠보니 둘째형님은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작년에 환갑이 지난 큰형님은 추석이 다가오면 이 산 저 산에 흩어져 있는 윗대 어른들의 산소를 찾아가 성묘할 일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다. 벌초를 부탁할 만한 일가붙이가 도회로 떠나버린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고 그나마 돈을 쥐어주고 부탁할 수 있었던 촌로도 조만간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다. 사촌들을 끌고 새벽같이 나서 앞을 분간 못하게 자라버린 풀을 헤치며 헤매다 보면 자정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제사나 명절을 지내고 나면 큰형수는 으레 몸살을 앓고 만다. 두 딸 시집 보내고 나서 혼자서 그 많은 제수를 장만하자니 몸이 견뎌내지를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다 위의 무인도 같은 존재일 수는 없다. 사방팔방으로 얽힌 관계와 인연이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래서 전통이 중요한 것이다. 전통을 부정하면 나 자신도 갈 곳이 없어지고 만다. 이런 이유에서 공동체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에서 홀로 떨어지지 않았다. 사회 속에서, 그 사회를 지탱해주는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있고 난 뒤에야 사회도 있다는 주장은 인간의 본질을 왜곡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명절을 지키고 전통을 보전하기 위해 얼마나 힘에 부치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지 직시해야 한다. 승산없는 싸움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지 냉철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조상 돌보는 것도 ‘아생연후’(我生然後)라는 ‘자유주의식’ 항변을 더 이상 내칠 일만도 아닌 것이다.

    힘들지만 즐거운 ‘귀성’ 전통… 우리 세대로 끝나려나

    ‘부산에서 서울까지 승용차로 20시간’이라고 하는 웃지 못할 ‘명절 증후군’을 해마다 되풀이하는 이면에는 시간에 대한 초조함이 배어 있다. 어차피 이 전통은 우리 세대로 끝이 나고 말 것이라는 패배감이 우리의 의식을 짓누른다. 그래서 이 최후의 의식에 더 정성을 기울이려 한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무릎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고 지레 부러질 각오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결심이라면 조금 머리를 숙이더라도 현실로 다가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전통을 지켜 나가되 그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해야 할 비용을 줄여나가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제사상을 간소하게 차리는 것은 물론 ‘역귀성’도 괜찮다. 성묘를 현실화하는 방법도 찾아보자.

    감당 못할 싸움을 계속하다 어느 순간 두 손 들고 돌아서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워서 하는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 자꾸 의문이 생기는 현실 아닌가. 아버지는 제사를 모신다며 절을 하고 잔을 올리는 초등학생 손자를 흐뭇하게 바라보신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 착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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