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2

2000.09.21

슈퍼마켓·도로에서도 차례 지키기는 철칙

  • 입력2005-06-22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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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곳은 보스턴에서 2시간 반 정도 떨어진 작은 시골동네다. 집 앞은 강이고 뒤는 산인데다 어디를 가든 걸어서 10분 거리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대형슈퍼마켓에 갔다. 계산을 하는데 아뿔싸 지갑을 차에다 두고 온 것이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부랴부랴 차에 가서 지갑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웬걸, 뒷사람들이 계산도 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바로 뒤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는 편안한 얼굴로 ‘O.K.’ 사인을 보내왔다. 두고 보아야 알 일이지만 이곳에는 ‘신사’만 사는 모양이다.

    미국과 영국 도로에는 곳곳에 로터리(미국과 영국에서는 돌아들어오고 돌아나간다고 해서 라운드어바웃(Roundabout)이라 한다)가 있다. 먼저 도착한 차가 먼저 진입하는 것이 라운드어바웃의 상식이다. 상당히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교통문화다. 새벽 5시에도 변함없는 간격으로 운영되는 한국의 일률적인 신호등에 비해볼 때 말이다.

    등교길에 생긴 일이다. 이곳 교통문화에 미숙한 나는 단지 ‘눈치’에 의존하며 조심스레 라운드어바웃 진입선에 다다랐다. 언제 가야 하는지 어쩔 줄 몰라하는데 왼쪽에 먼저 도착한 차량이 내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초보인 줄 아는 모양이다. 그 중년여자는 먼저 가라는 수신호까지 써가며 나를 편안하게 안내해주는 것이다. 좀더 두고보아야 알 일이지만 이곳에는 ‘숙녀’만 사는 모양이다.

    우리는 기다리는 것에 대해 많은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나름대로 빨리 가기 위한 방법을 만들어내고 터득해 나간다. 웬만한 패밀리 식당에 가면 입구에 ‘Please wait to be seated’라고 해서 안내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안내판이 있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병원의 출납구에는 엄연히 줄이 만들어져 있건만 중간에 머리를 내미는 사람들로 각축을 벌인다. 먼저 차지하면 되는 버스나 지하철의 좌석문화와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가정이나 학교로 들어가 보아도 그렇다. 어린아이의 학급진도가 조금만 떨어져도, 보충수업에 조금만 늦어도, 어른들이나 선생들의 ‘희망’과 ‘기대’에 보조를 조금만 맞추지 못해도 안달하며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를 외치며 앞으로만 나아가게 한다. 마치 100m 단거리 주자들처럼.



    뉴밀레니엄이 우리에게 효율과 스피드로 중무장한 스마트한 인재만을 필요로 한다고 착각하지 말자. 이전의 우리 선조들이 그랬듯이 멀리 보고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끈기, 그리고 미국의 인디언들이 그랬듯이 말을 타고 가다가는 중간중간 내려서 자신이 돌아온 길을 보며 영혼이 좇아오기를 기다리는 여유조차 없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인조인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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