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1

2000.09.14

‘허구와 실재’의 공존

  • 입력2005-06-20 1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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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구와 실재’의 공존
    소크라테스는 왜 독약을 마시게 됐을까?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들어 스승의 죽음을 말한다. 그는 동굴에 갇힌 죄수들이 항상 보는 벽에 나타난 사물의 그림자를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로 비유하며 그것을 ‘허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허상’ 속에서만 사는 죄수들에게는 동굴 바깥의 ‘진실’을 경험하고 온 죄수가 오히려 광인에 불과한 것이다.

    그 ‘광인’이 바로 스승 소크라테스였고 그는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보이는 모습의 세계 뒤에 항상 불변하는 존재인 동시에, 시공성에 구애되지 않는 실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서양철학의 근원은 현상과 실체를 이분하는 대립적 세계관이란 말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동양은 어떤가. 산천초목의 대지에는 천지만물 이외에 초월적인, 변화하는 사물과 유리된 불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경호의 이번 전시에도 그런 동양적 사유가 담겨 있다. 그의 작품은 물-거울과 함께, 그것에 반사-투영된 영상이 담겨 있다. 종이에 그린 화면을 슬라이드로 촬영하고 그것을 다시 물속의 볼록거울에 투영시킨 후 거울에 반사된 화면을 벽면에 드러낸다.

    그는 모네의 ‘수련’ 연작을 설치 형태로 변형시켰다고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을 도구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 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인 것 같다. 내성적이던 어린 시절과 늦은 나이의 유학생활로 사물과 사람을 관찰하게 되었고 그것에서 비롯된 자연에 대한 관조는 그가 말한 바대로 ‘강태공의 낚시’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한지에 그려진 대나무와 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뒤의 공간인 무(無)나 공(空)의 세계로 관객을 인도하기 위한 수단과 상징으로 나무와 새가 읽힌다. 이는 그의 작품에서도 분명히 감지되는 시공의 초월이 아닌, 시공 자체로의 회귀, 유를 통해서 무를, 시간적인 것(the temporal)을 통해 무시간적인 것(the a-temporal)을 도출해내는 과정이며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그 파장, 욕조의 물속에서 넘실대는 바다의 모습으로 물이 살아 있음을, 즉 ‘물’ 자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예술이란 것이 단순히 자연의 반영(허상)이 아니라 물이라는 자연 실체에 주목하며, 그것에 생명감을 불어넣는 창조행위라는 것을 구체화했다.

    고경호의 작품에선 관객의 눈에 보이는 수면에 떠 있는 꽃잎-나뭇잎의 실재와, 벽면에 비친 화면이 구분되지 않는다. 즉 물 위에 있는 꽃잎, 물속의 카메라를 바라보는 관객 등은 실재이지만, 물을 통해 비춰지는 화면에 나타난 모습은 ‘허상’처럼 보인다. 실재가 허구이며 허구가 실재로 표현되는 이런 모습은 서구미술에서 흔히 말하는 사물을 재현-반영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결국 허구와 실재가 따로 있을 수 없는, “꿈속의 나비가 나인지, 꿈을 꾸는 내가 나인지”를 물으며 “세상의 존재 방식보다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신비”를 아름다운 시선으로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관객과 작가, 작품을 하나의 존재로 일체화해내는 그만의 미(美)이다. 금산갤러리, 8월30일∼9월8일까지. 문의:02-735-6317∼8. 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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