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1

2000.09.14

일본은 왜 마쓰시타를 찾는가

부동산 투기 멀리하고 본업에 충실한 ‘경영의 신’…10년 불황 타개책으로 각광

  • 입력2005-06-17 13: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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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왜 마쓰시타를 찾는가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1894∼1989) 마쓰시타전기산업 창업자. 가난을 없애겠다는 신념 하나로 일본 최고 갑부자리에 오른 뒤 사재를 털어가며 정치개혁을 추진했던 마쓰시타의 경영이념이 요즘 다시 일본에서 각광받고 있다.

    일본 교토(京都) 남쪽에 있는 마쓰시타자료관은 개관 6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의 경영정신을 배우려는 각 업체의 사원 연수단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젊은 창업자나 공인회계사들도 적지 않다. 지금까지 방문객은 3만3000여명. 일본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오히려 관람객이 부쩍 늘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몇 시간 동안 마쓰시타의 강연록이나 영상테이프를 관람한 뒤 하나같이 “바로 지금의 일본이 마쓰시타 같은 경영자가 필요한 시기”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쓰시타는 최근 일본 아사히신문이 실시한 밀레니엄특집 설문조사에서 지난 1000년간의 가장 위대한 경제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득표율은 전체 응답자(8559명) 중 31.2%. 2위인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혼다기연공업 창업자(12.0%)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지주집안의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마쓰시타는 부친이 쌀장사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다. 찢어지는 가난을 경험한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오사카(大阪)에 나갔다가 지나가는 전차를 보고 “앞으로는 전기의 시대”라는 데 착안했다. 그리고 곧바로 전기회사에 입사해 전기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5세 때의 일이다.



    22세에 독립해 전기제품을 만들어 팔았다. 전구를 한꺼번에 두 개씩 끼울 수 있는 쌍소케트와 자전거의 전지라이트가 크게 히트하자 20대 후반에 청년실업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미 부모형제는 가난을 이기지 못한 채 모두 병으로 사망하고 그 자신도 폐질환을 앓고 있었다.

    1920년대 세계공황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으나 그는 섣부르게 인력을 감축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사업부제를 도입하고 주 2일 휴무제를 실시했다. 경기가 조금 어려워졌다고 사람부터 자르고 보는 현대 기업들보다 훨씬 앞선 경영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종업원들에게 경영실태를 투명하게 공개해 ‘유리창 경영’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가난했던 경험 때문에 부동산 등의 투기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1980년대 말 부동산투기에서 시작된 거품경제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에서 새삼 마쓰시타의 경영이념을 되새기고 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

    “마쓰시타전기의 사명은 물자를 끊임없이 만들어내 굶주림 없는 이상향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오늘부터 250년간을 사명달성 기간으로 정한다.” 그는 1932년 5월5일 사원들에게 이같이 선언한다. 그는 일본종교인 천리교를 견학한 뒤 ‘경영이란 세상에서 가난을 없애는 성스러운 사업’이라고 생각하게 됐던 것.

    마쓰시타전기는 아직도 이같은 정신을 이어받아 매일 아침 각 사업장에서 ‘산업보국 정신’ 등 ‘일곱 가지 정신’을 경전처럼 외우며 하루 일과를 시작해 ‘마쓰시타교(敎)’라고 부를 정도. 이 회사 관계자는 “일종의 종교일지도 모르지만 배타적이지 않고 ‘돈 버는 기계’는 더더욱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경영이념을 위해서라면 회사가 망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투철한 사명감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군정으로부터 일제군부에 협력한 재벌로 지정돼 기업해체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그는 1946년 ‘번영으로 평화와 행복을’이라는 의미의 영문자를 딴 PHP연구소를 설립한다. 전후 일본이 악성 인플레, 식량부족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사회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사상가의 길로 접어든 것. 그 후 3000회 이상의 강연을 다니며 무세(無稅)국가 구상이나 헌법개정 등에 관한 자신의 이념을 전파했다.

    1976년 록히드사건으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당시 총리가 체포되는 등 정치불신이 극에 달하자 마쓰시타는 정치개혁에도 눈을 돌린다. 그리고 1979년 6월 사재 70억엔을 출연해 마쓰시타정경숙을 창설했다. 이 정경숙 출신의 정치가는 국회의원만 21명에 이른다.

    그는 평소 “(도산의) 원인은 모두 회사 사장에게 있다. 일본이란 나라의 장래도 역시 총리 한 사람의 책임이다. 지금까지 총리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확실한 이념을 갖고 국민에게 강하게 호소한 총리는 거의 없었다”며 정치인에게도 강한 신념을 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경영이념 전파를 위해 120세까지 살겠다며 의욕을 불태우던 그는 1989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 마쓰시타전기 전사원 중 3분의 1은 마쓰시타 사후 입사했지만 마쓰시타 정신은 아직도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월 취임한 나카무라 구니오(中村邦夫) 사장은 “무조건 상사라는 이유로 잘난 체하지 말고 부하직원과 같은 눈높이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마쓰시타 같은 뛰어난 경영인들이 각고의 어려움 끝에 일궈낸 경제대국 일본. 그러나 최근 10년간 거품경제가 붕괴되면서 경제는 불황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국가재정은 파탄 직전에 있다. 지금 마쓰시타가 살아 있다면 뭐라고 충고할까. 다음은 아사히신문이 그의 저서와 연구서 등을 토대로 가상으로 재구성한 ‘마쓰시타 천상(天上)강연’.

    “최근 10년을 돌이켜보면, 경영자 여러분에게 ‘본업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본업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毒)만두를 먹고 죽기도 하고 중독되기도 했다. 나도 부동산에 손을 대면 큰돈을 번다는 권유를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요즘의 소고백화점 도산이나 유키지루시(雪印)유업 식중독 사건을 보면 모두들 ‘소비자에게 좋은 상품을’이라는 경영이념을 잊은 듯하다. 경영자의 정신상태도 문제다.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도 부하직원만 자를 뿐 경영자나 간부 스스로 책임지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를 깊이 반성하고 정부에 기대지 않는 자주독립의 기개를 갖고 도전하면 일본 경제는 분명히 다시 일어설 것이다.”

    일본은 물론이려니와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의 경영자에게도 교훈이 되는 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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