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0

2000.09.07

맨손 20대가 일군 ‘동대문 신화’

㈜문군트렌드 문인석 대표…350만원으로 3년 만에 연 매출 30억원 패션 벤처기업 키워

  • 입력2005-06-15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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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손 20대가 일군 ‘동대문 신화’
    서울 신당동 한 건물 지하에 자리잡은 ㈜문군트렌드. 사무실 중앙에는 전날 패션쇼에서 쓰인 옷가지가 잔뜩 널려 있고 한쪽 벽면에 부착된 재봉틀 노루발에는 박음질이 채 끝나지 않은 천조각이 맞물려 있다. 사무실이라기보다 조악한 공장을 방불케 하는 이곳은 단돈 350만원으로 시작해 연간 30억원 이상의 매출액을 자랑하는 패션 벤처기업이다. 길에서 마주치면 ‘웬 날라리인가’ 싶어 위아래를 훑어볼 만큼 톡톡 튀는 외모의 문인석씨(29)가 이 회사의 대표로, 그는 동대문 밀리오레 성공신화의 주역이다.

    ‘옷의 부적화’가 결정적 성공 포인트

    “IMF 때문에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돼 창업을 결심했어요. 빈털터리여서 아버지께 통사정해 500만원을 빌렸죠. 우선 150만원으로 그동안 빚진 것 갚고, 350만원을 창업 자금으로 삼아 ‘문군’(Moon Goon) 상표가 달린 옷을 만들었는데 그야말로 ‘대박’이 터진 겁니다. 전대도 부족해 쇼핑백에까지 돈을 가득가득 채웠으니까요.”

    문씨가 밀리오레 1.2평 가게에 입주한 것은 지난 98년 겨울이다. 전시용으로 만들어놓은 발토시가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문군’ 초창기에는 일부 소매 상인들의 요청으로 아예 발토시만 전문 제작했다. 각 지방 상인들이 독점 판매권을 요구할 정도로 발토시는 인기폭발. 치마를 입고 싶지만 각선미에 자신없는 여성들이 신체적인 약점을 커버하는 데 발토시만큼 안성맞춤인 패션소품이 없었던 탓이다. 전국의 ‘못생긴 종아리’ 덕에 그의 전대는 두둑해졌다.

    이듬해인 99년 2월, 문씨는 발토시 제작 경험과 수익금을 밑천으로 영캐주얼웨어를 직접 만들었다. 신제품이 출시된 지 딱 3개월. 매장과 창고 안에 있던 옷이 모두 바닥나버렸다. 그 흔한 광고 전단 한장 뿌리지 않았다. 일명 입소문의 위력에 힘입어 10대 후반∼20대 중반의 여성들이 몰아닥쳤고 순식간에 ‘문군’의 열성 신도가 됐다.



    ‘문군’ 옷이 뜨자 각종 모조품도 동대문상가를 도배했다. 모조품 역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이른바 ‘문군 스타일’이 지금까지 유행의 한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브랜드 네임’과 ‘제품 컨셉트’가 N세대의 취향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제 이름과 캐릭터를 알리기 위해 ‘문군’이란 이름을 지었어요. 영캐주얼인 만큼 밝고 싱싱한 이미지를 담아야 하는데 제가 환갑이 넘어도 ‘문 할아버지’가 아닌 ‘문군’으로 부를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회사 이미지를 젊게 유지할 수 있죠.”

    다소 익살스러운 브랜드 이름에 비해 제품 컨셉트는 ‘샤머니즘’이다.

    “중세의 동굴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어두운 동굴 안에 까만 망토를 걸친 주술사가 빨간 횃불을 들고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주술적이면서도 미스터리한 느낌이 나지 않나요? 사람들의 무의식에 깔려 있는 샤머니즘에서 착안한 전략이에요.”

    그래서 ‘문군네’가 생산하는 옷 색깔은 검은색과 빨간색, 흰색으로 한정지었고, 문양은 불꽃과 문신을 변형해서 표현했다. 바로 현대인의 불안감과 무의식 속에 내재된 샤머니즘을 포착해 ‘이 옷을 입으면 액을 막아준다’는 옷의 부적화가 ‘30억 대박’을 불러온 가장 큰 성공 요인이다.

    그렇다고 ‘문신’ 하나로 30억원을 거머쥔 어부지리 성공신화는 아니다. 첫 직장이던 광고회사 시절부터 약 4년에 걸쳐 문씨만의 철저한 준비과정이 있었다.

    문씨는 LG애드 기획팀에 있을 때 패션회사 광고제작을 지원하면서 옷장사에 눈을 떴다. 이 일을 위해 의류업계 전반에 걸쳐 시장조사를 하며 의류업체 사장들의 성공담을 접하는 순간 ‘나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스스로 패션사업에 뛰어들 경우 어떤 점이 유리한지 알기 위해 시장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패션사업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유리하고 감각만 있다면 빠른 시간 안에 성장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다른 어떤 업종보다 성공확률이 높은 분야라는 것을 깨달았다.

    “N세대는 나름대로 독특한 개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 욕구에 맞추려면 작은 규모의 시장이 많이 형성될 수밖에 없어요. 작은 회사에서 소량으로 만든 제품일수록 가치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가전제품이나 반도체 회사처럼 특별한 기술과 오랜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패션이 문씨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분야였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아 틈만 나면 남대문상가를 돌며 옷 한 벌씩 쫙 뽑아 입었어요. 워낙 개성이 강한 옷만 골라 입고 다녀 별명이 ‘양아치’였으니까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끼’가 있다고 할까. 게다가 경영학도여서 감성과 이성,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점이 남들보다 훨씬 유리했던 거죠. 패션업계 종사자들은 감성은 뛰어나지만 마케팅이나 경영기법은 취약한 편이거든요.”

    문씨는 본격적으로 패션산업에 뛰어들기 전, 도-소매시장의 물류동향과 소비자 선호도 등을 파악하기 위해 홍익대 앞에서 작은 옷가게를 시작했다. 동업이어서 큰돈을 벌진 못했지만 대신 옷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전과정을 단시간에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사업준비 전(前) 단계로 패션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쿠기와 보성인터내셔널 등에서 그는 홍보와 마케팅일을 전담하며 자료를 모으고 인맥을 넓혀나갔다. ‘사람은 행동하기 위해 태어났다’를 철학으로 사는 그의 결단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 망설임이란 단어는 그의 사전에 없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일단 저지르고 본다. 자연히 앙상한 이론보다 풍부한 경험이 그의 친구가 되었다.

    스스로 적당한 때 포기할 줄 알고 절대 후회하지 않는 것을 장점으로 꼽았다. 한번은 지인으로부터 1000만원의 사기를 당했다. 하지만 1000만원 찾자고 사기꾼의 꽁무니를 쫓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깨끗이 포기한 대신 제품개발에 전력을 쏟았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늘 반문하며 작은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도 그가 생각하는 사업가의 필수 덕목이다.

    낮과 밤이 다른 그의 두 얼굴도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 광고회사를 다니던 시절부터 낮에는 샐러리맨, 밤에는 옷가게 사장이었다. 당장 돈을 벌겠다는 목적보다는 도`-`소매시장의 물류 동향과 소비자 선호도를 파악하기 위한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이렇게 실전 위주로 차곡차곡 창업준비를 해나가던 97년, 그만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고 말았다. IMF 영향으로 문씨도 결국 실업자대열에 선 것이다. 소규모로 홈쇼핑, 기획사일 등을 해봤지만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98년 가을 동대문시장에 갔다가 우연히 밀리오레가 개점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IMF가 터져 당시 옷장사는 죽을 쑤고 있었고, 밀리오레도 상가분양이 잘 안 돼서 빈 상가가 많았거든요. 다들 미래를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전 달랐어요. 사업의 호기라고 생각했죠. 남들이 안 될 때 내가 선점하면 일단 주목받을 수 있거든요.”

    그러나 빈 상가는 많았지만 처음에는 입점을 거절당했다. 당시 문씨는 베테랑 장사꾼도, 디자이너 출신도 아니었기 때문에 분양 자격조건에서 밀린 것이다. 오지랖이 넓은 그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예전에 일하면서 알게 된 한 동대문상가 주인과 밀리오레 운영이사를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그때 보증금 100만원, 일세 2만5000원에 입주한 상가가 연간 30억원 대박을 터뜨리게 될 줄이야.

    지난 연말 지나치게 사업을 벌인 게 원인이 돼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직영매장을 다섯 곳으로 줄이는 등 한발 후퇴하는 선에서 잘 극복해냈다. 현재 그는 내수시장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을 넘보고 있다. 현재 ‘문군’ 브랜드는 일본 홍콩 인도네시아 등지에 진출한 상태. 앞으로 동남아시아 시장을 공략한 후 유럽, 미국 시장에도 진출할 예정이다. 동대문 성공신화의 여세를 몰아 국내 최대의 패션회사를 설립하는 게 문인석씨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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