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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치 마지막 승부수는 ‘명예퇴진’

외자유치 후 자연스런 ‘경영진 물갈이’ 노리는 듯…안팎 상황 점점 궁지로, 최후의 결정 임박

이익치 마지막 승부수는 ‘명예퇴진’

이익치 마지막 승부수는 ‘명예퇴진’
‘남은 문제는 이제 단 하나.’

현대사태가 일요일이던 8월13일을 기점으로 진정 국면에 접어들면서 재계 주변에서는 이제 이익치 회장 등 가신 출신 경영인들의 처리 문제만 남았다는 말이 나돌았다.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가 발생한 뒤 두달이 넘도록 꼬여왔던 현대사태가 지난 일요일 현대측의 추가 자구계획 발표로 일단 숨통이 트인 뒤의 일이다.

김재수 구조조정위원장이 일요일 오후 △정주영 회장의 현대차 지분 매각 △현대건설 추가 유동성 확보 △지배구조 개선 등의 자구대책을 내놓은 뒤 이러한 흐름은 월요일부터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때마침 금융감독원은 현대전자의 외자유치 당시 현대중공업측에 지급보증을 요구하면서 손실보전각서를 써준 것과 관련해 이익치 회장을 소환 조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당시부터 줄곧 이회장의 퇴진을 주장해온 참여연대 역시 이날 이회장을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비슷한 시기에 이익치 회장측에서는 ‘출두하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현대증권 관계자는 이날 “못 나갈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로 이회장의 출두 사실을 확인했다. 현대증권측은 이회장의 손실보전각서는 97년 당시로서는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는 관행이며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당연히 비슷한 각서를 써주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이미 변호사를 통해 법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금감원의 분위기와 현대측의 분위기는 약간 달랐다. 금감원 쪽에서는 이회장의 ‘자진출두’ 사실을 강조하는 반면 현대측에서는 ‘아직 연락받은 바는 없지만 연락이 오면 못 나갈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회장 쪽의 일종의 버티기로 금감원 조사가 문제 경영인 퇴진으로 비치지 않게 하려는 현대측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한편 현대측에서는 이회장 소환 사실이 기정사실화된 이날부터 현대투신운용과 현대증권 등 금융계열사에서 진행 중인 미 아메리칸인터내셔널그룹(AIG)과의 외자유치건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총 9000억원대의 외자유치 협상이 진행 중인 마당에 이익치 회장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이 협상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현대증권 관계자는 “우리가 현대의 금융 계열사에 투자하는 것은 이회장의 탁월한 마케팅 능력 때문”이라는 협상 파트너측의 의견을 덧붙이기도 했다. 일부 언론의 ‘오늘 소환’ 보도가 나왔던 8월14일에도 이익치 회장은 이번 외자유치건의 성사를 위해 출국 일정을 잡아두고 있었다는 것이 현대증권의 설명이다.

물론 현대측은 이러한 언급이 시장에서 “또 현대가 ‘꼼수’를 쓰는구나” 하는 의구심을 자아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현대투신운용은 이미 외자유치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국내 실사까지 마친 바 있다.

그러나 반대로 현대측이 이렇게 외자유치 협상을 내세우는 데는 다른 배경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자유치 협상이 성공리에 마무리돼 외국인 대주주가 들어올 경우 어차피 경영진이 물갈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회장으로서는 현대사태의 와중에 불거진 ‘문제 경영인 퇴진론’에 휘말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자연스런 후퇴의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일종의 명예퇴진론이라고나 할까. 이와 관련해 현대측 관계자는 “현대의 금융 계열사들은 이미 시장의 힘에 의해서라도 법적으로 우리의 손을 떠났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미 AIG가 사실상 인수한 현대투신운용뿐만 아니라 현대증권이나 투신운용에서도 AIG측이 지분의 20% 이상을 차지해 최대주주로 부상할 가능성을 예고했다.

일요일 오후 김재수 구조조정위원장이 발표한 자구안 중에서도 이미 이익치 회장의 퇴진이 결정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김위원장은 발표문 3개항 중 기업지배구조개선 항목에서 인사 문제를 그나마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인사 문제 처리는 관련 회사의 이사회 규정 및 주주총회 절차에 따라 조만간 처리하도록 하겠다’는 것. 여기서 ‘관련 회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현대증권을 지칭하는 것이고 ‘인사 문제’는 이익치 회장의 거취라는 해석이다. 현대 구조조정위원회 관계자도 “‘조만간’이라는 의미는 마냥 끌고 간다는 뜻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대가 앞으로도 채권단이나 여론, 정부의 요구를 무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동성 위기라는 현대사태의 본질을 외면한 채 정부가 특정인을 향해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는 기존 시각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것 같은 인상이다.

게다가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도 현대측이 자구방안을 발표한 다음날 아침 문제 경영인 퇴진과 관련해 ‘조만간 가시적인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거들고 나왔다. 이러한 언급은 금감원과 이익치 회장측이 ‘소환’이냐 ‘자진 출두’냐를 놓고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던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이회장 거취와 관련해 상당한 정도의 조율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현대사태가 장기화되면서 현대 내부에서도 직원들을 중심으로 이회장 거취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던 것도 이회장측으로서는 외면할 수 없었던 현실이다. 현대 내부에서는 가신그룹 퇴진이 막판 변수로 등장하자 이회장 퇴진을 둘러싸고 내부 의견이 크게 갈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 현대 관계자는 “이회장이 퇴진할 경우 그동안 이회장의 추진력으로 인해 호전됐던 사업 성과나 늘어났던 외형은 줄어들겠지만 더 이상 여론의 도마에 오를 일이 없는 만큼 현대증권으로서는 플러스 효과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정황들이 이익치 회장으로 하여금 결국 ‘이사회 규정과 주주총회 절차’라는 단서를 달아 명예퇴진하는 길을 택하게 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현대 관계자는 “다음주면 모든 것이 결정날 것”이라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남는 문제 한 가지. ‘현대용 개각’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정도로 현대에 우호적인 인사들로 꾸려졌다고 평가받은 정부의 새 경제팀이 이익치 회장에 대해 처음부터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가 이번 ‘이익치 드라마’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흥밋거리 중 하나다. 이와 관련해서는 당초 진념 경제팀이 현대 문제, 특히 인적 청산 문제를 친(親) 시장적으로 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김대중 대통령의 일갈에 밀려 강경노선으로 돌아섰다는 것이 정부나 현대측의 공통된 인식인 것 같다. 또 이익치 회장의 ‘이헌재 경제팀 흔들기’가 김대통령이 강경노선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회장과 관련한 정치자금 소문도 꼬리를 잇고 있다. 그러나 아직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현대사태와 관련한 ‘경제적’ 타결은 실마리를 보이고 있지만 ‘정치적’ 타결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는 말이다.



주간동아 2000.08.24 248호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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