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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서

잊지 못할 산행

잊지 못할 산행

잊지 못할 산행
몇 년 전 선배언니와 함께 산에 올랐었다. 모처럼의 외출이라 사진기도 메고 김밥도 싸고, 소풍가는 초등학생의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 해서 가볍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꽤 가파르고 험했다. 산을 탄다는 표현보다는 네 발로 기어올라갔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다시 내려가고 싶었지만 정상에 오르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달라서 꼭 정상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선배언니는 발걸음이 너무 가벼워 보였다. 나 때문에 계속 처지는 게 미안해 정상에서 만나기로 하고 선배언니를 먼저 보냈다.

‘세월아 네월아’ 하고 가는데 내 뒤로 어느 산악회 회원들이 한꺼번에 올라오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늦게 올라가는 건 아니었지만 뒤통수가 너무 따가웠다. 그런데 그때 마침 누군가의 손이 나의 등을 밀고 있었다. 힘도 안들이고 한참을 올라가서야 뒷사람들에게 길을 양보할 수 있었다. 숨을 돌린 뒤 내 등을 밀어줬던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뒤를 돌아보았더니 30대 초반의 말쑥한 남자였다. 고맙기도 했지만 창피한 생각에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인사를 한 뒤 먼저 올라가라고 했더니 다짜고짜 내 손을 잡고는 나를 끌다시피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부담스럽고 무서운 건 둘째치고 그 아저씨의 걸음이 너무 빨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냥 먼저 올라가라고 간곡하게 부탁도 해보고 짜증도 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 황당한 것은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 우리를 애인사이로 착각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손만 잡고 가니까 여자친구가 못 올라가는 거여. 엉덩이를 한 대씩 때려주면 잘 올라갈 거여.” 어이가 없었지만 애인이 아니라고 부인할 힘도 없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정상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 100여명쯤 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아저씨는 부산 어느 산악회를 인솔해서 왔는데 앞에서 내가 너무 힘들게 올라가자 회원들을 먼저 올려보내고 일부러 뒤떨어진 것이었다.



정상에서 김밥도 나눠 먹고 커피도 한잔 마시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산을 내려가면서도 아저씨는 나와 동행해 주었다. 선배언니랑 셋이서 많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아저씨는 산을 다 내려온 뒤 정상에서 둘이 찍은 사진을 꼭 보내달라고 하면서 명함도 한 장 건네주었다. 그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그날 해가 지도록 산을 내려오고 있었을텐데….

요즘 산에 오르면 가끔 그 아저씨 생각이 나서 한번씩 웃게 된다. 미안하게 사진도 못 보내주고 전화도 못했지만 아직 따끈따끈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지금쯤 험한 산을 한걸음에 오르고 있을테지. 결혼은 했을까? 그 당시엔 결혼을 안했다고 했다. 언젠가 어느 산에서 만나게 되면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꼭 얘기해주고 싶다.



주간동아 2000.05.25 235호 (p9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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