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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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훈 왕국’에 해는 지는가

숙적 왕리청 9단에 기성 타이틀 내줘…체력 부담, 집중력 저하가 원인인 듯

  • 입력2006-03-08 1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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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가는 세도 없고 열흘 붉은 꽃 없다고 했던가.

    일본바둑 일인자 조치훈9단이 3월8, 9일 일본 에히메(愛媛) 현에서 열린 제24기 기성전 도전7번기 제6국에서 대만 출신의 도전자 왕 리청(王立誠) 9단에게 불계패를 당해 종합전적 2승4패로 랭킹 1위 기성(棋聖) 타이틀을 잃었다.

    우승상금 3300만엔이 걸린 기성전은 일본 랭킹 1위 기전으로 조치훈9단은 지난 96년부터 내리 4연패 중이었으며, 이번에 이겨 5연패를 달성했으면 명예기성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외관상 조치훈9단은 산전수전 다 겪은 제왕답게 담담했다.

    “명예기성을 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가 봅니다. 왕9단은 기성의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조9단은 정작 명예기성을 입에 올려 패배의 변을 대신했지만, 일본 바둑계의 반응과 관심은 그깟 명예기성이 문제가 아니었다.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있다지만, 그동안 일본바둑에서 조치훈이 드리웠던 날개의 그늘이 워낙 드넓었기에, 대붕(大鵬)의 추락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것이었다. 새 시대의 전주곡이기 때문이다.



    조치훈시대의 파열음은 이미 지난해 한국의 후배 조선진9단에게 4승2패로 본인방을 잃고 대삼관 행진이 마감되면서 나타났다. 당시 비교적 약체 도전자로 평가되던 조선진9단에게 당한 패배는 동시에 본인방 11기 연속제패 좌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놓친 격이어서 생각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이어 기성전 도전자로 나선 왕리청9단은 평소 ‘조치훈 킬러’로 불리는 상대인지라 말하자면 이번 기성전 도전기가 새천년 조치훈시대의 롱런 여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지였던 셈이다.

    일본에서 전적면에서 조9단을 앞선 기사는 필생의 라이벌 고바야시(小林光一) 9단(60승57패)말고는 왕9단(30승1무28패) 정도다. 이번 도전기에서 2승차를 벌리기 전까지는 서로 반타작 승부였으나 왕9단은 남들이 꿈도 못꿀 시기에 조9단에게 도전하여 왕좌(王座) 타이틀을 빼앗고(95년, 3대 0) 방어(99년, 3대 1)하는 등 중요한 도전기에서 인상적인 투혼을 보여 ‘킬러’ 소리를 듣게 되었다.

    왕9단의 기풍(棋風)은 바우 같은 그의 생김새처럼 전형적인 힘바둑을 구사하는 스타일이다. 이에 비해 조치훈9단의 바둑은 타개에 능하고 치열함을 주무기로 삼지만 대신 엷다. 기성전 도전6국이 132수만에 단명국으로 끝난 것도 조9단이 타개에 실패해 대마가 잡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치훈시대가 이것으로 끝났다고 보는 이는 별로 없다. 곧 컴백할 것으로 보는 이가 많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동안 ‘이틀바둑(제한시간 8시간)의 신’으로 불리며 철옹성을 자랑하던 그가 이틀바둑에서 연거푸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마흔네 살이라는 나이가 주는 체력적인 부담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얘기했듯 그의 바둑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치열함이 장기다. 그러나 체력저하로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제 아무리 목숨을 걸고 둔다한들 몸 따로 마음 따로일 수밖에 없다. 예전의 조치훈은 초읽기에 몰릴수록 정확했으나 근래에는 오히려 초읽기에서 실수를 많이 한다.

    또 하나는 너무 정상에 오래 군림함으로써 맞이하게 되는 일종의 권태기. 승부사는 짜릿한 상대를 만날수록 긴장하게 마련이다. 두각을 나타내는 차세대 주자도 아닌 올해 38세인 중견기사에게 일인자 자리를 내주었다는 데에서도 그의 긴장 이완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승부세계에서는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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