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6

2000.03.23

‘흘러간 노래’는 이제 그만!

지역감정 자극, 색깔론 공방 ‘그 수준이 그 수준’ …여 “개혁 지속” 야 “빈부격차 책임져라” 공방

  • 입력2006-02-21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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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흘러간 노래’는 이제 그만!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Stupid! It’s economy).” 클린턴과 보브 돌 상원의원이 맞붙었던 96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이 한마디는 클린턴의 승리를 굳혀주는 결정적인 선거 캐치프레이즈로 작용했다. 한 쪽 팔을 부상당한 보브 돌의 ‘전쟁영웅 이미지 만들기’를 누른 역작으로 평가되는 선거 구호이기도 했다.

    물론 미국 이야기다. 총선이나 대선 등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새로운 정당이 생겨나고 한 정당이 통째로 특정 지역으로 몰려가 기자회견을 열며 지역감정을 부채질하는 우리 정치판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꿀 일이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16대 총선에서 이런 구도가 변화될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여야가 정책 공방을 벌였다는 말은 언론에 거의 등장한 적이 없지만 지역감정 공방이나 색깔론 공방을 벌였다는 말들은 신문지상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16대 총선에서 그나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통적으로 여당이 ‘안정’을 강조하고 야당이 ‘변화’를 강조하는 데 비해 이번 총선에서는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개혁의 지속’을, 야당인 한나라당이 ‘개혁의 방향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야간 정책 전선의 폭은 오히려 더욱 줄어든 셈이다.

    새천년민주당은 IMF 관리체제로 인한 국가 부도의 위기에서 경제를 재건시킨 치적을 강조하는 데 정책 홍보의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1년반만에 IMF 관리체제를 극복하고 흑자 기조를 정착시킨 것은 전적으로 집권여당의 몫이라는 것이다. 민주당이 중앙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정책라인에 이재정 정책위의장 대신 국민회의 시절 IMF 위기 극복 과정에서 2년 가까이 정책위의장을 맡았던 김원길의원을 컴백시킨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관계자는 “야당 시절부터 대선을 거치면 서 위기 극복 과정을 함께해 온 김의원이야말로 IMF 극복의 상징적 인물로는 ‘최적’ 아니냐”고 말했다. 김의원은 요즘 생계 빈곤자들을 위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등은 이미 IMF 위기로 나라가 부도 위기에 몰려있을 때부터 ‘준비된’ 개혁 법안이라는 점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설명하고 있다. 야당의 소득분배 구조 악화, 즉 ‘빈부격차 심화’ 논리에 대한 방어논리이자 반격인 셈이다. 민주당은 이를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서민가계회복 대책 △중산층과 서민의 세금 경감 △소규모 영세 자영업자 지원 △벤처기업 활성화 △200만개 일자리 창출을 통한 완전고용 등을 공약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지난 10일 내놓은 ‘최근 경제상황에 대한 평가’ 자료에서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97년 0.283에서 99년 4분기에는 사상 최고수준인 0.327로 늘어났다며 빈부격차 심화 문제를 물고늘어졌다.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부터 1까지의 숫자로 나타내는데,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정도가 심한 것으로 평가되며 0.4를 넘을 경우 심각한 불평등 상태로 평가된다.

    물론 한나라당이 공략하는 민주당 경제 정책의 허점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통화량 증가로 인한 인플레 우려, 재정적자 누적, 외국 자본 의존형 산업구조 등등 IMF 위기 극복과 최근 경제 성장세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지적되어온 문제점들을 총동원해 맹공을 퍼붓고 있다. 그리고 그 맨 앞에는 대우경제연구소장을 지낸 이한구 선거대책위원회 정책위원장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나라당의 비판이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데다 총선 이슈로 부각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민주당은 야당의 지적에 대해,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통화량(M2) 증가는 ‘투신권의 자금이 은행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라고 맞받아쳤고, 재정 적자 문제도 이미 ‘2004년 균형 재정 달성’이라는 목표 아래 적자폭을 꾸준히 축소하고 있다며 일축하는 분위기다. 이를 두고 한 경제학자는 “한나라당이 정책적 정체성을 세우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숭실대 이성섭교수(경제학)는 “야당이 힘을 받아야 정책 대결이 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민주당은 ‘결과적으로 경제가 좋아지지 않고 있느냐’는 데에 머물고 있을 뿐이며 한나라당은 ‘아예 여당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지 않나’ 할 정도로 정책 비판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정책 대결’이라는 프리즘으로 16대 총선을 관전하는 데 있어서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민주당이나 국민회의보다 자민련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스스로 야당임을 선언한 자민련이 총선 이후 입법 과정에서 어떤 투표 행태를 보일지가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집권 이후 개혁 입법 과정에서 공동 정권의 경제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자민련의 협력은 소수정권인 국민회의에 결정적인 원군으로 작용해 왔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대중정부가 경제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데는 김종필총리의 도움이 작지 않았다. 그가 내각제 문제를 둘러싸고 공동정부 내에서 갈등을 거듭했지만 개혁 정책 추진에 있어서만큼은 김전총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자민련이 스스로 야당임을 선언하고 정책공조 파기까지 선언했기 때문이다. 만약 선거 이후 자민련이 캐스팅 보트를 쥐고 민주당의 국회 입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김대중 정부가 노리는 집권 후반기 개혁은 어떤 형태로 꼬여 나갈지 예측 불허에 휩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민련은 현재 △21세기형 경제구조 전환 △2010년 G9 도약 등 거시적 정책을 내놓은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정책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진보정당을 표방하며 16대 총선에서 원내 진입을 목표로 하는 민주노동당이 재벌 해체, WTO(세계무역기구) 반대 등 선명한 정책을 선보이며 차별성 부각에 주력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이러한 정책 차별화가 어느 정도나 표로 연결될 수 있을지는 우리 정치문화에서 정책 선거가 가능한지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참여하고 있는 한양대 나성린교수(경제학)는 “정책 대결로 가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경실련이 총선연대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번 총선이 정책 대결로 가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여야의 총선 구도를 비난했다. 일부에서는 안정 기조를 찾은 경제가 지역감정에 기반한 여야의 총선 전략에 휘말리면서, 최근 비상이 걸린 경상수지 적자에서 보듯 다시 꼬이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경기대 신범철교수(경제학)는 “개혁 전체가 끝나지 않은 마당에 선거를 앞두고 개혁의 고삐가 느슨해지는 것 같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는 “한나라당식의 제2위기론에는 공감하지 않지만 선거 때문에 정책 방향이 멈칫거리다가 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는 인식은 지식인 사회에 퍼져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세수 증가냐 감세냐, 벤처 진흥이냐 제조업 활성화를 통한 산업구조 재편이냐 등등 정책 이슈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오히려 총선을 한달 앞두고 있는 정치인들에게는 이런 충고를 들려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바보야, 문제는 지역감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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