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2

1999.12.09

‘고성장-고위험’ 사정비서관

박주선-배재욱-이충범씨 ‘쓴맛’… 박철언-김영일씨 등은 ‘입지’ 발판으로

  • 입력2007-03-21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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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장-고위험’ 사정비서관
    많은 법조계 인사들은 “박주선전청와대법무비서관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사람은 바로 김태정전법무장관”이라고 말한다. 박전비서관이 사직동팀의 최종보고 문건을 김전장관에게 유출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김전장관이 박전비서관을 청와대로 ‘밀어’ 넣은 데서부터 불행의 씨앗은 잉태됐다는 얘기다.

    사시 16회에 수석합격한 박전비서관은 검찰 동기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선두주자였다. 전남 보성 출신이지만 ‘영남 정권’ 아래서도 대검중수부1, 2, 3과장과 서울지검 특수1, 2부장 등 요직을 줄줄이 거친 ‘잘나가는’ 검사였다. 검찰인사 때마다 “야당과 내통하고 있다”는 음해가 잇따랐지만 당시 TK, PK출신의 검찰수뇌부는 그의 ‘실력’을 인정해 오히려 그를 감싸주었다.

    김두희전법무장관이 서울지검장을 지내고 있을 때의 일화. 검찰 인사를 앞두고 안기부에서 “박주선검사가 김대중 평민당총재의 외곽조직인 연청 사무실에 드나든 장면이 목격됐다”는 첩보가 청와대에 올라갔고, 박검사를 “한직으로 내쫓으라”는 지시가 검찰쪽에 전달됐다. 그러나 김전장관은 박검사를 불러 “그런 사실이 없다”는 확인을 받고 “자네를 음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충고한 뒤 되레 박검사에게 좋은 보직을 줬다.

    김태정전장관이 박주선씨 추천 ‘불행의 씨앗’

    그럴 만큼 검찰조직 내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기에 박전비서관은 굳이 ‘고속출세’를 바라고 청와대에 들어갈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98년 2월 청와대 비서진을 구성할 당시 박전비서관은 주위 사람들에게 “김태정검찰총장이 법무비서관으로 들어가라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며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중권대통령비서실장은 당시 법무비서관에 고려대 후배인 이모검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태정검찰총장은 동교동계 실세인 K의원에게 부탁해 박전비서관을 법무비서관 자리에 밀어넣었다.



    김대중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 만들어진 ‘법무비서관’의 역할은 크게

    △정부요직 인사검증

    △사정업무 총괄

    △공직 기강 확립

    △대통령의 법률자문 등 네가지.

    과거 대통령비서실의 사정담당자들이 권한을 남용했던 폐해를 없애고 정부기구를 축소한다는 취지로 대통령비서실장 직속의 1급 직책으로 격하됐으나, 그 권한은 과거 사정수석이나 민정수석에 못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셈이다. 법무장관이나 검찰총장 인사 때에도 대통령에게 후보자의 검증자료를 보고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법무장관이나 검찰총장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당시 김총장이 자신의 심복과 같은 박전비서관을 법무비서관 자리에 앉히려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광주고-서울대 법대 선후배인 데다 ‘형님, 아우’하는 막역한 사이. 97년 11월 김총장이 김대중대통령의 비자금수사 유보를 발표할 때에는 대검중수부 수사기획관이었던 박전비서관이 발표문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김전장관의 과욕은 두 사람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김전장관이 자기 욕심만 내세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자리에 앞길이 탄탄한 능력있는 후배를 보냈다가 신세를 망치게 한 셈이다.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권력의 꼭대기에서 자칫 중심을 잃으면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 쉬운 자리가 바로 ‘법무비서관’ 자리라는 사실은 이번 사직동팀 문건유출 파문에서도 다시 확인됐다.

    그런 전례는 박전비서관 말고도 여러 차례 있었다. 박전비서관에 앞서 김영삼정부 때 사정업무를 맡았던 배재욱전사정비서관이 그 대표적인 사례. 배전비서관은 사직동팀을 동원해 김대중대통령의 비자금을 추적했고, 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그 자료를 한나라당 정형근의원에게 넘겨줘 폭로케 함으로써 정치개입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정권교체 직후 당시 김태정검찰총장의 ‘보호’로 DJ비자금 문제는 무사히 넘어갔지만 결국 진로그룹 장진호회장으로부터 1억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고 말았다.

    김영삼정부 출범과 함께 사정1비서관에 임명됐던 이충범변호사도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오르다가 사건의 뢰인으로부터 과다수임료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 6개월만에 옷을 벗어야 했다.

    이처럼 정치개입과 월권의 폐해가 잦았기 때문에 대통령비서실내의 사정담당 부서는 역대 정권에서 여러 차례 조직이 바뀌는 풍파를 겪었다. 5공 때는 사정수석비서관실이 별도로 존재했으나, 6공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정기능과 사정기능이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이유로 민정수석실로 통합됐다. 그러나 5공청산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정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돼 사정수석비서관실은 다시 부활됐다. 김영삼정부 들어 사정수석실은 다시 민정수석실로 통합됐고 김대중정부에서는 아예 법무비서관실로 격하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권에서 사정비서관이나 민정비서관 자리는 서로 가고 싶어했던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특히 검사들에게는 고속승진이 보장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사법시험 8회 출신인 자민련 박철언의원과 한나라당 김영일의원은 검찰인사에서 초고속 승진의 특혜를 누리다가 정치권으로 진입한 대표적인 케이스. 5공 후반기에 법률비서관을 지냈던 박의원과, 6공에서 사정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의원은 검찰인사 때 사법시험 기수로 여섯 기나 위인 사시 2회 선배들과 동렬에 서서 부장검사-차장검사로 승승장구했다. 심지어 박의원의 경우 청와대에 검사를 파견할 때 주어지는 보직인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자리가 아예 검사장급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김의원 역시 사정비서관으로 재직할 때 검찰내의 요직인 서울지검 3차장 검사로 승진했는데 실제 근무는 청와대에서 하면서 3 차장 검사 자리는 공석으로 비워둬 검찰 내에서 특정인을 위한 편법인사라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두 의원처럼 사정비서관이나 민정비서관 출신 중 정치권에 진입한 인사가 많은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다.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자연스럽게 집권여당의 공천권자인 대통령의 눈에 띄어 발탁되거나 스스로 정치권으로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한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 또 거꾸로 사정 민정비서관 자리는 권력핵 심부나 정치권으로 진입하는 데 필수코스이기도 했다.

    한나라당 강재섭 김기춘 김영진 최연희 김길환 박종웅 김무성의원 등이 모두 사정-민정-법률비서관 등의 경력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 ‘이조 정랑’을 아십니까

    현 법무비서관과 비슷 … 인사파워 막강, 당쟁격화 요인으로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1급의 직위에도 불구하고 차관급인 수석들 못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정보’의 힘이다. 이 ‘정보’를 기초로 대통령의 인사권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사 문제에 있어 직급 이상의 지위를 누리던 자리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법무비서관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 정랑(吏曹 正郞)이라는 자리를 보면 대통령제하의 법무비서관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자리는 홍문관 출신의 연소문신(年少文臣), 지금으로 치자면 행정 부처의 최고 엘리트들로만 임명되었다. 정랑은 정5품의 벼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관 인사에 있어서만큼은 정승이나 판서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누렸다. 정3품 이상 당상관들도 길에서 이조 정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렸다는 기록까지 전해진다. 특히 정랑이 자신의 후임자까지 지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당쟁의 와중에서 ‘자기 사람 심기’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그렇다면 이 무소불위의 정랑 자리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대신의 권한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생긴 이 자리는 결국 각 정파의 치열한 쟁탈전의 대상이 되어 당쟁을 격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숙종 때에 이르러 정랑이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게 규정한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이 폐지되고 18세기에는 결국 이들의 권한을 제한하게 되었다.

    이조 정랑의 불우한 결말을 보고 궁지에 몰린 법무비서관 자리의 미래를 떠올리는 것은 호사가적 취향일까. 사시 수석 합격에 빛나는 박주선비서관의 경우를 본다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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