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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유시민은 ‘영웅의 몰락’이 아니라 오판과 오만을 들여다봐야

조국이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뉴스1]

[뉴스1]

조국 법무부 장관 기용에 대한 찬반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조 장관을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과 비교하는 발언이 나왔다. 정치인에서 인문학 스타 작가로 변신한 유시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유 이사장은 8월 29일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조국 사태는 그리스 고전 비극의 구조를 닮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왕이나 귀족, 장군처럼 다 잘나가는 사람인데 가족 비극과 얽혀 운명적 파국을 맞는다. 조국은 학벌 좋고 잘생기고 키도 크고 집안에 돈도 많은 데다, 대통령의 전폭적 신임 아래 출세가도를 달리니 사람들 눈에 완벽한 인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딸이 이상하게 학교에 들어가고 가족 펀드로 돈을 축재했다고 하니 조국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던 소위 명문대 출신 기자들이 ‘잘난 척은 다하더니 너 잘 걸렸어’라며 신나게 영웅 몰락의 서사를 집단창작하고 있다.’


그리스 비극과 싸구려 스릴러의 차이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조국사태가 그리스 고전 비극을 닮았다고 주장한 유시민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조국사태가 그리스 고전 비극을 닮았다고 주장한 유시민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진행자 김어준은 이 얘기를 듣고 있다 “그게 주는 쾌감을 인정해야 한다. 독일어에도 그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는데…”라고 추임새를 던졌다. 그러자 독일에서 유학한 유 이사장은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남이 당하는 불행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즉 조국처럼 모든 것을 갖춘 듯한 영웅이 몰락하는 서사가 주는 쾌감을 예감하면서 기자들이 집단창작으로 조국을 나쁜 놈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 고전 비극은 잘나가던 사람이 꼬꾸라지는 것을 보며 쾌감을 느끼는 대중의 쾌감에 기초한 작품이다. 과연 그럴까.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할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가 그것을 피하려는 필사적 노력에도 결국 그 덫에 걸려 자신의 두 눈을 후벼 파고 거지꼴로 떠도는 모습을 보며 “잘코사니”를 외치는 이가 얼마나 될까. 트로이 정벌의 성공을 위해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맏딸을 신에게 재물로 바친 아가멤논이 10년 전쟁 끝에 승전하고 귀국한 첫날밤 딸의 복수를 외치는 아내의 칼에 비명횡사하고, 다시 둘째딸과 외아들이 아비의 복수를 위해 어미를 살해하는 골육상잔을 지켜보면서 “꼴좋다”고 말할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오이디푸스가 떠난 뒤 테베의 왕이 된 크레온과 오이디푸스의 딸로 크레온의 며느리가 될 예정이던 안티고네가 각각 ‘국가의 논리’와 ‘천륜의 논리’를 내세우며 건곤일척의 논쟁을 벌이다 결국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낄까, 오싹함을 느낄까. 



유시민과 김어준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의 질투와 시기에 기초한 이 작품들이 왜 고전으로 불리는 걸까. 인문학 전도사를 자처하는 사람이 고전 비극의 가치를 그렇게 폄하해도 되는 걸까. 

유 이사장도 이 대목에서 켕기는 게 있었던 듯하다. 그리스 비극이 질투와 시기심에 기초한 통속극인 것처럼 얘기하다 갑자기 싸구려 스릴러로 장르 변경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 비극에서 저질 스릴러로 국면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릴러에서 악당들이 주인공을 제압하지 못할 때 가장 흔히 쓰는 수법이 가족을 인질로 삼는 거 아니에요? (언론에서 공을 넘겨받은) 검찰이 ‘네가 안 물러나면 가족이 다쳐’라고 (조국 당시 장관 후보자를) 협박하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 고전 비극이나 싸구려 스릴러는 별 차이가 없다. 전자가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심보에 기초한 장르라면 후자는 열세를 만회하고자 가족을 희생양으로 삼는 장르다. 전자가 영웅이 가족 비극에 얽혀 파멸하는 새드엔딩이라면 후자는 가족 인질극 속에서도 영웅이 승리하는 해피엔딩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마르티아와 휘브리스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모로가 그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1864). [미국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모로가 그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1864). [미국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그리스 고전 비극의 가치는 영웅 몰락이라는 표면적 서사구조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 몰락이 불가항력적이라는 심층구조가 더 큰 역할을 차지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영웅의 몰락은 보통 두 가지 개념을 통해 설명된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제시한 하마르티아(hamartia)고, 다른 하나는 영국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가 언급해 유명해진 휘브리스(hubris)다. 

하마르티아는 좀 더 폭넓은 개념이다. ‘판단 착오(오판), 실수, 패착, 과녁을 빗나감, 성격적 결함’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비범한 재능과 품격을 지닌 영웅이 어떤 사악함이나 나쁜 의도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제어하기 힘든 성격적 약점 또는 타고난 결함, 잠시잠깐의 판단 착오로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간다. 그런데 그 영웅이 겪는 고통과 불행이 너무나 어마어마하기에 누가 봐도 부당하게 여겨지는 실수가 바로 하마르티아에 해당한다. 부당한 폭력에 맞서다 엉겁결에 살인을 저지른 오이디푸스, 승리감에 취해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망각한 아가멤논, 며느리가 될 아녀자와 말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오기를 부린 크레온의 잘못이 바로 하마르티아에 해당한다. 

휘브리스는 좀 더 보편적 개념이다. 하마르티아로 분류될 성격적 결함 중에서도 콕 찍어 오만을 뜻한다. 자신이 이룩한 성공에 도취해 스스로를 신격화하다 신의 분노를 사 몰락과 파멸에 이르게 되는 자만심을 말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 왕좌에 앉은 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자’임을 자부하던 오이디푸스. 그는 자신에게 패배한 줄 알았던 스핑크스가 실은 자신에게 영원한 패배를 안겨주고자 신이 설치한 덫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신의 저주를 피하는 것을 넘어 여 보란 듯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더 큰 화를 부른 셈이다. 아가멤논의 휘브리스는 1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정복자라는 오만함이요, 크레온의 휘브리스는 저주받은 피가 섞이지 않아 정통성 있는 왕인 자신에게 감히 도전하다니라고 생각한 자만심이다. 

토인비는 문명의 발전 법칙으로서 ‘도전과 응전의 원리’를 제시한 자신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 창조에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빠지는 함정으로 휘브리스를 언급했다. ‘자신들의 성공으로 교만해지고, 추종자들에게 복종만을 요구하며,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지적·도덕적 균형을 상실하고, 가능과 불가능에 대한 판단력도 잃어버리는 현상을 보인다. 이를 휘브리스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남아 있는 내용이 대부분 그리스 비극에 집중돼 있다. 그래서 그리스 비극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시학’은 그리스 비극의 6대 요소로 줄거리(플롯), 성격, 문체, 사상, 시각적 효과, 작곡을 논하는데 그중 가장 방점을 찍은 것이 성격이다. 그래서 그리스 비극을 성격비극이라고 하는 것이다.


죄의식에 대한 씻김굿

이에 따르면 그리스 비극의 정수는 하마르티아와 휘브리스에 있다. 조국 사태를 굳이 그리스 비극에 비견하겠다면 반드시 이를 논해야 한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최순실 사태라는 도전에 대한 적극적 응전으로 집권에 성공한 현 세력이 삐끗 판단 착오(하마르티아)로, 아니면 우리야말로 정의의 화신이라는 오만함(휘브리스)으로 큰 화를 자초한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조국 장관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관련 의혹이 대부분 조 장관이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 인물의 문제라며 “조국 자신이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고 강변한다. 이 역시 하마르티아로 논파가 가능하다. 대학교수 시절 고관들을 매섭게 비판한 말과 글이 씨앗이 돼 관직에 오른 뒤 스스로를 옥죄는 운명의 오랏줄로 돌아온 것. 그것이 바로 하마르티아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현 정부의 남다른 도덕적 자부심이 결국 정권의 명운을 흔드는 지진해일로 밀어닥치는 것 역시 하마르티아이자 휘브리스다. 

유시민과 김어준은 그리스 고전 비극을 읽으면서 샤덴프로이데의 감정에 심취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그런 고약한 쾌감이 아니라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에 휩싸여 눈물까지 흘린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나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더 크고 높은 것에 압도되면서 인간으로서 느끼는 죄의식을 정화하고 영혼을 승화시키는 심리적 효과다. 죄의식에 대한 씻김굿,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논한 카타르시스의 본질이다. 이를 외면한 채 그리스 고전 비극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허위고 교만이 아닐까.






주간동아 2019.09.20 1206호(창간기념호②) (p06~08)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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