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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돼지가 대량으로 살처분되는 상황에 이르면 돼지고깃값이 치솟을 수 있으니,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필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돼지고기와 우리 정신건강의 상관성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돼지고기 김치찌개, 제육볶음, 돼지불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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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군대의 급식 메뉴가 돼지불고기나 제육볶음인 날은 왠지 더 힘이 솟고, 밥도 평소보다 더 많이 먹었을 것이다. 돼지고기는 우리의 체력을 보충해주는 소중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물론 쇠고기라면 더 신났을 테지만, 쇠고기가 나오는 날은 돼지고기가 나오는 날보다 훨씬 드물었다. 퇴근길, 친밀한 동료들과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이는 맛도 진정 일품이다. 값비싼 쇠고기와 달리 영양만점에 포식까지 할 수 있는 돼지고기야말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 면에서 최고다. 더 저렴한 닭고기도 있지만, ‘입의 호사’를 누리는 데는 돼지고기가 으뜸이다.
또한 돼지는 재물과 복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돼지저금통’ ‘돼지꿈’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돼지를 떠올려보라. 우리 마음까지 푸근해진다.
하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앞으로 돼지고기가 혐오 대상이 될 수 있다. 사실 돼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없었던 건 아니다. 돼지는 뚱뚱하고 게으르며 닥치는 대로 먹기만 한다는 이미지도 있다. “너, 돼지 같아”라는 말은 상당히 모욕적인 표현이다.
돼지고기에 대해서도 혐오와 공포의 감정이 숨어 있다. 우리는 삼겹살을 먹으면서 비만이나 심혈관계 질환에 걸릴까 두려워한다. 요새는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갈고리촌충 등 기생충 감염 우려도 컸다. 우리가 쇠고기와 달리 돼지고기는 충분히 익혀 먹는 습관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무서운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했으니, 사람들은 더욱더 돼지고기를 철저히 익혀 먹을 것이다. 병든 돼지일까 걱정돼 아예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생길 수 있다. 우리에게 친근했던 음식이 혐오와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으로 취급받는 것은 아닐까 심히 우려된다.
돼지고기조차 맘껏 먹지 못하다니
또한 돼지고기가 짜증과 분노를 유발할 수도 있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전국으로 퍼지거나 상시 질병으로 자리 잡는다면? 돼지고기는 한국인이 즐겨 먹는 음식 리스트에서 점차 하위로 밀려날 것이다. 오늘은 왠지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데, 꺼림칙해서 그 욕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니 짜증이 난다.특히 돼지고깃값이 폭등한다면 분노까지 일으킬 수 있다. 꺼림칙해 스스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을 때와 값이 비싸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때는 천지차이다. 돼지고기조차 맘껏 먹지 못하다니, 서민의 마음에 분노가 솟구친다. 그렇다고 쇠고기가 값싸질 리 없다.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돼지고기를 값싸고 안전하게 먹게 해주세요’라는 청원이 올라올 수도 있다. 돼지농가를 비롯해 돼지고기 관련 유통업체, 식당, 가공업체 종사자의 좌절감과 분노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테다.
마지막으로 돼지고기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빼앗긴 것,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단지 농촌의 문제가 아닌 이유다. 돼지고기는 전 국민이 즐겨 먹는 음식이므로 채식주의자가 아닌 이상 어느 누구도 이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만약 누군가가 된장, 고추장, 김치, 깍두기, 마늘, 고추, 상추 가운데 앞으로 한 가지를 먹지 말자고 한다면 여러분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우리의 삶에서 먹는 즐거움이 제한되는 상황은 사소해 보일지라도 사실 매우 힘들고 어려운 욕구 억제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하루빨리 진압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우리 식탁에서, 저녁 회식자리에서 돼지고기를 지켜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