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루 벤투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부임한 지 만 1년. 한국 축구는 또다시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벤투 감독 스스로 “본격적인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표현할 정도다. 

이제부터는 살짝만 헛디뎌도 감당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이목이 쏠린 만큼 여론으로 옮겨 붙는 속도도 점점 빨라질 테다. 최악의 경우 목을 내놔야 할 수도 있다. 2014 브라질월드컵이, 2018 러시아월드컵이 그랬다. 이번만큼은 월드컵 본선을 딱 1년 남기고 감독을 갈아치우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벤투 감독은 8월 서울 신문로 대한축구협회축구회관에서 선수 26인 명단을 공개했다. 선발진의 경우 벤치에 앉을 멤버까지 총 23명이 필요하나, 늘 그랬듯 예비 인원을 추가로 뽑았다. 교체 명단에라도 이름을 올리려면 소집 후 포지션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이렇게 긴장된 상태로 꾸린 선수단을 9월 5일 평가전 무대에 올렸다. 상대는 조지아. 닷새 뒤로 잡힌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1차전 투르크메니스탄전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실험적이었던 조지아戰

조지아전에서 벤투 감독은 파격적인 라인업을 빼 든다. ‘플랜B’로 삼았던 스리백에 신예를 대거 기용했다. 백승호가 생애 두 번째 A매치를 맞았고 이강인, 구성윤, 이동경이 데뷔전의 영예를 안았다. 이에 더해 익숙지 않은 옷을 입히기도 했다. 최전방이나 측면 공격을 겸했던 황희찬을 오른쪽 윙백으로 놨다. 수비까지 겸하며 대차게 뛰라는 지시였다. 결과는 2-2 무승부. 내용은 답답했다. 개개인의 공격 성향이 두드러져 팀 밸런스가 무너졌고, 간격까지 벌어지면서 상대가 무혈 입성하는 장면이 잦았다. 벤투 감독도 부인하지 않았다. 특히 전반전 45분을 가리켜 “부임 후 17경기 중 최악”이라고 시인했다. 

투르크메니스탄전은 기존 베스트 라인업으로 회귀했다. 그간 벤투 축구를 조금이라도 더 경험한 이들로 재구성했다. 손흥민-황의조가 최전방 출격했고 이재성, 황인범, 나상호, 정우영, 김영권 등이 선발 복귀했다. 2차 예선은 무엇보다 결과가 중요하다. 객관적 전력에서 뒤지는 상대를 확실히 잡는 게 핵심. 전반 중반 나상호의 득점으로 앞선 대표팀은 경기 막판 정우영의 프리킥 득점을 보태 2-0으로 이겼다. 물론 선제골 이후 느슨해진 흐름이 썩 만족스럽진 않았다. 상대를 맘껏 요리할 주도권을 선점했음에도 이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아시아권 국가와 경기에서 꽤 오랫동안 노출돼온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긍정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선수단 내부와 외부, 두 가지 차원에서다. 먼저 한국 축구는 지난해 FIFA 랭킹 1위 독일이라는 대어(大魚)를 낚았다. 그것도 실점 없이 두 골이나 몰아친 완벽한 승리. 이후 국내 A매치는 연이은 매진 행렬로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2010 남아공월드컵 첫 원정 16강 이후 한국 축구는 늘 ‘재건 중’이었다. 이렇다 할 결과물 없이 무너지고 다시 쌓기를 반복했다. 독일을 꺾고 팬들의 관심이 몰렸을 뿐, 아시아축구연맹(AFC) 8강 탈락에서 봤듯 여전히 증명해야 할 게 적잖다. 그 와중에 긍정적 대목을 짚어보자. 

흥미로운 건 선수단 반응. 조지아전을 마친 손흥민은 믹스트존에서 열변을 토했다. 이미 인터뷰에 도가 튼 선수다. 흘러넘치는 여유에 할 말만 딱 하는 절제력까지 갖췄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아픈 구석을 푹푹 찔러가며 꽤 긴 시간을 할애했다. 한국을 가리켜 “약체”라고 꼬집더니 “정신력부터 문제”라는 주장을 펼쳤다. 조지아전 전술 실험 문제보다 선수 개개인의 태도를 질타하며 “이런 경기력으로는 월드컵에 못 나간다”고 묵직한 한방을 날렸다.

“흥민이 형이 하는 말이라면…”

손흥민의 발언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몰고 온다. 그는 2011 아시안컵 인도전 당시 A매치 데뷔 골을 넣고 손 하트를 그리던 앳된 청년이 더는 아니다. 또 2014 브라질월드컵 때 벨기에전에서 패한 후 엉엉 울던 것도 한참 전 얘기다. 손흥민은 최근 FIFA가 발표한 월드베스트 공격수 부문 15인에 들었다. 아시아 국적 선수 가운데 유일하다. 그런 그가 때로는 본인부터 각성하며 팀 전체의 분발을 촉구한다. 실제 대표팀 내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흥민이 형이 하는 말이라면…’ 하는 암묵적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고 한다. 

투르크메니스탄전 결승골의 주인공 나상호도 반성의 목소리를 냈다. 경기를 영리하게 운영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굴었던 데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선제 득점 뒤 안일하게 다가선 모습을 콕 집었다. 승리에 도취하지 않은 선수들 모습에서 개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은 열려 있다”는 벤투 감독의 메시지

물론 아직 2차 예선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카타르월드컵 개막 기간인 2022년 11월까지는 3년도 더 남았다. 너무 자주 반복되는 잔소리는 되레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표팀은 국내외 프로리그를 통틀어 가장 잘한다는 이들만 모아둔 선발 집단. 개성도, 자존심도 강한 조직을 한데 어우르다 보면 반감도 생길 법하다. 유럽 명문 팀도 늘 팀 내 불화로 고생한다. 역대 한국 국가대표팀에서도 없었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잘해보자’는 내적 동기가 강한 정도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이를 얼마나 능숙하게 밀고 당기느냐는 캡틴 손흥민의 몫일 테다. 

외적으로는 벤투 감독을 포함해 코칭스태프의 역할이 중요하다. 필자는 조지아전을 굉장히 흥미롭게 봤다. 벤투 감독이 가진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경직’이다. 포르투갈 대표팀을 이끌던 시절부터 이어져온 이 습성은 개인 성향과 맞닿아 있다. 다양하고도 파격적인 선수단 구성 대신 틀에 박힌 형태로 안정적으로 승리를 따내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김판곤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장이 벤투 감독의 이런 캐릭터를 몰랐을 리도 없다. 

벤투 같은 감독은 주전 조를 확실히 잘 꾸린다. 하지만 대안이 없을 수 있다는 게 함정이다. 특정 선수로 연출하는 일련의 축구가 먹히지 않을 때 우회할 방도가 불확실한 것이다. 또 외면받는 선수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쓰던 선수를 계속 쓰니 인력 풀을 넓히기 어렵고, 부상이나 기량 저하 같은 이유로 생긴 구멍을 메우기도 버겁다. 무엇보다 경쟁의 치열함이 떨어진다. 자리를 꿰찬 선수들, 자리를 놓고 도전하는 선수들의 간극이 크다. 결과적으로 팀의 대외 경쟁력을 해친다. 

이를 깰 가능성을 내비친 게 조지아전이다. 낯선 포메이션 제시, 색다른 포지션 기용 외에도 새로운 얼굴을 추가로 내세웠다. 현재 K리그 등지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문은 열려 있다, 포기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벤투호 출범 이래 처음 대표팀에 소집된 김신욱이 투르크메니스탄 골키퍼와 그토록 격렬하게 경합한 배경에는 그런 간절함이 깔려 있었을 테다. 

카타르월드컵까지 선수단 내외의 동기는 무척 중요하다. 축구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서로 신뢰하며 조직의 합을 끌어내야 뭔가가 나온다. 벤투호 내 대화가 활발하고, 조지아전에서 전과 다른 선수 기용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만 해도 고무적이다. 소통과 더불어 ‘누구든 도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월드컵까지 가는 길도 순조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