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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肉과 言, 궁중의 ‘남남녀상열지사’

유하 감독의 ‘쌍화점’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입력2009-01-13 18: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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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肉과 言, 궁중의 ‘남남녀상열지사’

    왕 역의 주진모(왼쪽)와 무사 홍림 역의 조인성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철학자 김영민 씨는 “살과 살 사이에는 말이 있다”고 한다. 연인의 살이 고기(肉)로 느껴질 때, 고기를 살로 되돌리는 법은 말밖에 없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그에게 ‘말’이 성적 욕망을 넘어서 지적 반려로 가는 동반의 나침반이라면, 새로 나온 영화 ‘쌍화점’에서 말은, 그 한마디 한마디 바늘땀 같은 말은 천 번의 살맞춤을 희생하고라도 얻고 싶은 반항의 칼침이다.

    아마도 유하가 조선보다 더 시간을 벌려 고려라는 시대적 배경과 구중궁궐을 선택한 이유도 이 토설의 내밀함에 대한 강박, 아니 결정적 한마디인 ‘연모’란 말을 내뱉는 것이 금지된 시간과 공간을 찾아 헤맨 결과였을 것이다. 기실 쌍화점은 ‘연모한다’란 토설 한마디에 모든 것을 건, 한 남자와 그 남자를 사랑하는 또 한 남자의 이야기다.

    후사가 없는 왕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무사 홍림으로 하여금 왕후와 대리 동침케 한다. 왕은 이미 10년간이나 홍림의 몸을 탐해온 터. 홍림과 왕후의 첫 번째 정사는 굴욕과 어색함, 감정의 냉동고에 붙박아둔 육체의 담합에 지나지 않았지만, 횟수가 더해질수록 그들은 열락의 정원에서 서로의 육체와 감정 모두에 눈을 떠간다.

    그런데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내 구실을 못하는 왕의 질투와 사랑이다. 홍림과의 사냥을 꿈꾸며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완성하려는 왕은 홍림의 감정에 집착한다. 자기 시선 아래서의 정사는 허락하지만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의 사적 만남을 허락할 수 없는 왕. 그러나 언젠가 밀통은 드러나고, 사통은 깨지게 마련. 왕이 칼끝을 겨누고 홍림에게 정녕 묻고 싶은 말은 왕후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가 욕정인가 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유하의 전작인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를. ‘비열한 거리’의 뿌리가 ‘말죽거리 잔혹사’에 있듯, 많은 면에서 ‘말죽거리 잔혹사’와 ‘쌍화점’ 역시 상통한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는 옥상 결투에서 승리한 뒤 아버지에게, 이 세계에게, 우주의 모든 억압자에게 마지막 일갈의 비수를 던진다. 그게 바로 “대한민국 학교 모두 X 까라 그래”라는 외침 속에 들어가 있는 권상우의 한 방이다. 그런데 이 한 방의 카타르시스와 그것을 토설하는 순간 감내해야 하는 공포가 ‘쌍화점’에서는 더 적나라하게 시각화된다.

    肉과 言, 궁중의 ‘남남녀상열지사’
    연모인가, 욕정인가

    왕은 왕후를 ‘연모’한다는 홍림의 말에 그에게 궁형을 언도한다. 그것도 거의 즉결심판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친구와 친구의 싸움으로 이상화됐던 소년 영웅의 판타지는 거두어지고, 왕과 홍림은 수컷의 자존심을 건 대결로 들어가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 즉 기존의 언론 담론이 아무리 ‘에로스’와 ‘배우’에 맞추더라도, 이 영화는 사춘기 소년의 성적 성장 스토리를 띠는 매우 ‘유하’적인 세계의 재현인 것이다.

    물론 감정적인 내밀함의 내연 장치로 공간은 유하에게 늘 중요한 곳이다. 과도한 장식과 조밀한 인테리어로 수놓아진, 금빛으로 단장한 궁궐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사실은 ‘새장 속의 새’ 이야기라는 점을 상징한다. 왕조차도 피해갈 수 없는 질식할 듯한 권력의 새장에 갇힌 인간들의 비극을 은유한다. 또한 홍림과 왕후가 밀회를 거듭하며 우수수 서책이 떨어져 나가는 서가야말로 모든 지적 억압과 문명의 세뇌를 뚫고 막힘없이 요동치는 파토스의 분출 장소로 적합하다.

    그런데 그 포장을 벗기고 보면, 에로스의 세계에 눈떠가는 홍림은 학교 울타리 안에서 동학들에 대한 동성애적 편린을 막 벗어나 여자의 몸을 알게 되면서 수컷으로서의 성정에 눈떠가는 소년들과 닮아 보인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옆집 누나와의 정사를 꿈꾸며 화장실에 낙서를 하는 소년. 그러므로 홍림을 둘러싼 수많은 정사 신은 일정 정도 육체로 빚어내는 성적 정체성의 일기나 다름없다.

    여성 관객들에게 아무리 푸짐한 눈요깃거리를 준다 해도, 본능적으로 나는 유하의 원형적 세계가 오이디푸스가 상연되는 비극의 무대이며, 동시에 그것은 영원히 사춘기를 벗어날 수 없는 소년의 세계라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해야만 왜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홍림(소년)에게 맞춰져 있는지, 그 에로스의 상당 부분이 성애 묘사에 쏠려 있는지 알 수 있다.

    肉과 言, 궁중의 ‘남남녀상열지사’

    왕후 역의 송지효.

    완급조절 못 하는 소년의 황홀

    냉정하게 보자면, 이 모든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려는 지난한 시도에 비해 ‘쌍화점’은 과잉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가 과잉이고, 아버지의 시선이 과잉이고, 육체의 판타지가 과잉이며, 시대에 대한 정형화된 묘사 역시 과잉이다. 오르가슴이 프랑스어로 ‘작은 죽음’이고 최고의 리비도가 죽음과 만나는 그 순간 스파크가 인다는 것이야 조르주 바타유가 누누이 이야기한 것이다. 그 과잉은 마치 완급을 조절하지 못하고 조기 사정하는 소년의 황홀감처럼 보인다. 게다가 ‘비열한 거리’부터 시작된 교차편집이나 한정된 장소에서 찍는 액션 신과 그 액션을 감정 과잉상태로 만드는 버릇도 여전히 되풀이된다.

    유하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를 아껴서 우직하게 정공법으로 말할 때 가장 좋아 보인다. 만약 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러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벽돌 쌓듯 더 견고하고 단순한 영화의 외장 속에 넣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이야기의 탄력성은 배가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젠가 유하 감독이 원숙한 사내의 시선으로 소년의 이야기도 할 줄 아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살과 말, 시선과 권력 그리고 자살과 살인의 꽃잎들이 우수수 쌍으로 떨어지는 세상. 쌍화점의 남녀상열지사에 대한 멋들어진 재해석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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