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신기술로 주목받는 미국 오큘러스VR의 헤드셋 ‘오큘러스리프트’.
꿈으로만 여겨지던 가상현실 시대가 드디어 개화하기 시작했다. 게임, 가상 놀이동산 등 일반 소비자가 즐길 만한 콘텐츠부터 3차원(3D) 계측 등 산업용 콘텐츠까지 다양한 범위의 가상현실 콘텐츠가 모습을 드러내면서다.
가상현실은 컴퓨터,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와 가상현실용 헤드셋을 이용해 특정 환경이나 상황을 실제처럼 느끼고 반응하게 하는 기술이다.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최근 몇 년간 가상현실 시대를 컴퓨터, 모바일 이후 성장동력으로 삼고 꾸준히 투자해왔다.
하드웨어는 충분, 문제는 콘텐츠
미국 오큘러스VR의 가상현실 헤드셋 ‘오큘러스리프트’가 대표적으로, 내년 초 일반 소비자용 오큘러스리프트가 판매될 예정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페이스북에 23억 달러(약 2조5000억 원)에 인수됐고 삼성전자와도 협력 중이다. 최근 삼성전자가 내놓은 ‘삼성 기어 VR’에도 이 기술이 쓰였다. 이 제품은 삼성전자 프리미엄급 스마트폰 갤럭시S6 시리즈와 결합해 사용하는 형태다.
일본 소니도 내년 플레이스테이션4(PS4)용 가상현실 헤드셋 ‘프로젝트모피어스’를 시판할 예정이고, 대만 스마트폰업체 HTC 역시 미국 게임 개발사 밸브(Valve)와 손잡고 연내 컴퓨터용 가상현실 기기를 선보일 계획을 세웠다. 글로벌 기업뿐 아니라 중소 제조사들까지 합치면 출시된 가상현실 기기는 2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하드웨어 기술은 충분히 발전했지만 그동안 관련 콘텐츠가 부족했다. 콘텐츠업계에선 게임 개발사들이 선뜻 손을 들고 가상현실 버전의 게임을 개발하는 데 나섰다. 모바일 게임 ‘앵그리버드’로 잘 알려진 로비오는 최근 가상현실용 앵그리버드판을 내놨다. 커다란 새들이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 밖에도 레이싱, 골프 등 여러 게임을 개발 중이다.
하지만 게임 하나로만 시장을 확장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 VR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다. 3월 문을 연 ‘삼성 기어 VR’ 전용 오큘러스 스토어에는 현재 게임, 동영상 재생 등 10여 개 콘텐츠가 등록된 상태다.
삼성전자가 내놓은 헤드셋 ‘삼성 기어 VR’.
미국 식센스(Sixense)는 최근 가상현실에서 구두나 운동화를 사는 ‘브이리테일(vRetail)’ 서비스를 선보였다. 가상현실에 구현된 매장을 돌아다니며 오프라인 매장에 직접 간 것처럼 제품을 고르고 구매한다. 컴퓨터 모니터스크린이나 스마트폰 화면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 확률도 적다. 등산 의류업체 노스페이스도 매장에서 옷을 고른 뒤 가상현실 기기를 착용하면 420피트(약 128m) 높이의 그랜드캐니언 절벽에서 그 옷을 입고 뛰어내리는 체험을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유통업계도 나섰다. 온라인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오프라인 매장 중심의 대형 유통업체들이 첫발을 들였다. 영국 대형 유통업체 테스코(Tesco)는 가상현실 기기 오큘러스리프트에 쓰일 가상현실 매장을 개발 중이며, 미국 유명 백화점 니먼 마커스는 매장에 ‘가상 거울’을 도입했다. 소비자가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면 QR코드를 인식해 옷을 직접 갈아입지 않아도 그 모습을 거울에 띄워준다. 영상 2개를 함께 띄울 수 있어 제품 비교도 가능하다.
자사 기기용 소프트웨어 플랫폼 개방
가상현실 놀이동산도 출격 대기 중이다. 디즈니랜드는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 캘리포니아 주 어바인에 있는 디즈니랜드의 놀이기구를 모두 가상현실 버전으로 만드는 중이다.
미국 더 보이드(The VOID)는 가상현실 게임센터 ‘VECs’를 내년 중순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 열 예정이다. 가상현실 기기와 팔, 손끝 동작을 인식하는 장갑을 끼면 진동이나 타격까지 느낄 수 있게 한 게 강점이다. 더 보이드는 하드웨어 개발을 마무리한 후 첫 센터를 열고 북미, 아시아, 유럽, 호주 등 세계 각 지역 주요 도시에 센터를 추가로 건립할 계획이다.
그뿐이 아니다. 하드웨어 제조사들도 자사 기기용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 개발 플랫폼을 개방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자사 증강현실 헤드셋 ‘홀로렌즈’용 애플리케이션 개발도구(API)를 콘텐츠업계에 공개했다. 삼성전자는 콘텐츠 개발자들이 다양한 범위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도록 5월 20일(현지시각)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무료 워크숍을 연다. 콘텐츠 개발을 위한 하드웨어 보급에도 열정적이다. 구글은 지난해 가상현실 기기를 종이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가상현실 기기 조립 세트 ‘카드보드’를 공개했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 있다.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에 기본 탑재된 운영체계(OS)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 콘텐츠 생태계가 빠르게 확대되려면 운영체계를 표준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은 가상현실 헤드셋 제조업체들이 자신만의 운영체계를 별도로 갖고 있다. 각 업체마다 콘텐츠를 개발해야 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가상현실 세계가 인체와 인류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적잖 다. 가상현실 기기는 고개를 빠르게 움직이거나 할 때 구토나 현기증, 두통, 피로감 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인간의 뇌가 이를 ‘현실’이라고 받아들일 정도로 가상현실 헤드셋 화면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화면과 눈 거리가 짧아 시력이 나빠질 수 있다는 것도 문제 중 하나로 지적된다.
‘지나친 현실감’ 탓에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보다 중독 현상이 심할뿐더러, 심지어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실제 소니는 자살 욕구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최근 프로젝트모피어스용 가상현실 게임에서 스스로에게 총을 겨누는 기능을 없앴다.
업계 관계자는 “VR 시장은 막 개화하기 시작한 셈”이라며 “기기가 보편화하고 콘텐츠 생태계가 자리 잡으면 이 같은 문제는 차례로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