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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말랐다고 하는데 3kg 정도 빠졌어요. 항해 중에도 하루 두 끼씩 잘 챙겨 먹었거든요. 주메뉴는 국밥과 비빔밥, 건조식품이었지만 씨앗을 수경 재배해 신선한 채소를 먹기도 했죠. 그래도 삼겹살은 참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웃음). 도착한 첫날 목욕탕에서 여독을 푼 뒤 이튿날 희망항해추진위원회 관계자, 대학생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삼겹살 파티를 하며 소원을 풀었습니다.”
뉴질랜드서 접한 요트 매력에 푹 빠져
파도가 심한 바다 위에서 자다 오랜만에 육지에서 잠든 소감은 어떨까. 그는 “바람과 파도, 돌발 상황 같은 긴장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잘 수 있어 오랜만에 아주 푹 잤다”고 말하며 밝게 웃음 지었다. 오히려 악몽은 출항한 직후 며칠 동안 계속됐다고.
“단독·무기항·무원조·무동력 조건을 지켜야 하는데 깨질까 봐 노심초사했어요. 초반엔 잠이 들면 아는 사람이 찾아와 배에 태워달라고 하는 통에 기록이 깨지는 악몽을 반복적으로 꿨죠.”
김 선장은 일본 방송영상원을 졸업하고 후지TV 외국인 1호 정사원으로 일하다 30대 후반 한국의 작은 프로덕션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들어왔다. 1년 동안 다큐멘터리 세 편을 만들었는데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프리랜서PD로 전향했다. 당시 훌쩍 떠났던 뉴질랜드에서 우연히 요트를 접했다. 그는 “뉴질랜드는 ‘요트의 왕국’이다. 어디든 10분만 나가면 요트장이 있고 출항 신고 없이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다. 처음 경험한 요트의 매력에 푹 빠진 건 그때부터였다”고 말했다.
첫 항해는 2010년 크로아티아에서 요트를 구매한 뒤 한국까지 2만km를 가로질러 들어온 것이었다. 그 요트가 바로 이번 항해의 주역인 아라파니호다. 김 선장은 “2005년 만들어져 비교적 견고했지만 무기항 세계 일주를 하기에는 작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예산에 맞춰 3억 원에 구매했고 한국까지 들여오는 데 운송비만 1억5000만 원이 들었다. 그런데 기항 세계 일주를 하는 7개월 동안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라마다 각양각색의 항구에 들러 여러 풍물과 사람들을 만났는데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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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여섯 번째, 한국에서 첫 번째로 단독·무기항·무원조·무동력 세계 일주 항해에 성공한 김승진 선장.
“서쪽에서 동쪽으로 태평양과 남극해, 대서양과 인도양을 지나 적도를 두 번 통과해 지구 한 바퀴를 돌아와야 했어요. 지난해 11월 27일 첫 적도를 지날 때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어요. 첫 산을 넘은 기념으로 처음 맥주 한 모금을 마시며 자축했습니다. 이후 남위로 계속 내려가면서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남위 40도선 이하는 파도가 높고 바람도 거센데, 초강풍에서 약풍으로 떨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였죠. 바람을 예측할 수 없다 보니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밀려왔어요.”
‘누군가의 꿈’이란 말, 항해 원동력
가장 큰 관문은 ‘바다의 에베레스트’라 부르는 칠레 최남단의 혼 곶(Cape Horn)이었다. 6~7m 높이의 파도 때문에 많은 요트가 전복돼 ‘요트의 무덤’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김 선장은 “갑판 아래서 잠을 자는데 몸이 거의 직각으로 서기에 잠에서 깼다. 천장 환기구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요트는 53노트(약 98km/h)로 달려 나갔다. 바람 소리가 제트엔진 소리처럼 공포스럽게 느껴졌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얼마쯤 지나자 혼 곶을 통과했고 요트 아래 3.2t짜리 밸러스트(배의 평형을 맞추는 추)가 곧바로 평형을 맞춰 정상적으로 항해를 이어갔다.
긴 항해 동안 김 선장은 숱한 어려움을 넘겼다. 심적으로 가장 어려웠을 때는 언제였을까. 그는 “요트 핸들을 자동으로 잡아주는 자동항법장치가 고장 났을 때”라고 말했다. 자동항법장치는 식사하거나 잠을 자는 동안 핸들을 잡아주기 때문에 꼭 필요한 장치. 고장이 날 경우 선장은 몇 시간이고 핸들을 잡고 있어야 한다.
“기온이 영하인 남극해를 지날 때 밤 12시쯤 자동항법장치가 고장 났어요. 급히 내복에 방풍방수복을 껴입고 갑판으로 나가 핸들을 잡았죠. 기계는 요트 뒤쪽 창고에 들어 있었는데 수시로 파도가 덮치는 위치예요. 3시간 반 동안 궁리 끝에 바다가 잠잠해질 때쯤 황급히 창고로 내려가 접촉 불량인 곳을 고치고 바닷물을 닦아낸 뒤 올라왔어요. 다행히 자동항해가 시작되더라고요. 춥고 어두운 상황에서 불안감이 극에 달해 정말 아찔했어요.”
반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을 경험하는 축복도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매일 저녁 지는 해를 바라볼 때면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남극해에서는 거대한 유빙을 지나칠 때 아찔하면서도 자연의 위대함을 느꼈다.
“높이 솟은 유빙은 그 자체로 예술이죠. 그러나 수면 위 1m 정도 높이의 유빙은 레이더에 잡히지도 않고 육안으로 예측하기도 힘들어 폭탄과도 같아요. 그런 유빙들은 ‘러시안룰렛’에 비유되는데, 부딪혀서 배가 깨졌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출항 전 많은 이가 그의 항해를 응원했다. 한 여대생은 자신의 희망을 아라파니호에 싣고 싶다며 후원금 1만 원을 보내왔다. 김 선장은 “가장 적은 후원금이었지만 가장 가치 있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그에게 ‘지금 당신의 항해는 누군가의 꿈’이라며 응원의 말을 건넸다고. 김 선장은 “힘들 때마다 그분들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라 포기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번 항해로 인생 후반전의 문이 열린 느낌이에요. 팀을 결성해 자금이 마련되면 세계적인 대회에 출전할 계획입니다. 장기적으로는 퇴직한 분들의 요트 길 안내자가 되고 싶어요. 저는 50대부터가 진정한 청년기라고 생각해요. 특히 요트는 취미로 치부하기에는 아쉬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요. 두려움에 맞서며 항해하다 보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