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브커피’ 등 유명 모바일 게임을 개발한 이대형 파티 게임즈 대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한 말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금융감독위원장, 경제부총리 등을 지내며 2000년대 초 우리나라에 조성됐던 1차 벤처 붐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발언의 바탕에는 창조경제가 벤처경제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각 분야에 있는 창의적 인재들이 적극적으로 창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창조경제 생태계가 조성된다는 얘기다.
여기서 창의적 인재란 ‘사업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인재를 말한다. 이들은 기술과 세상이 만나는 지점을 잘 파악한다. 이런 인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 대기업이다. 대기업에서는 기술과 노하우, 조직관리 능력, 사업화에 대한 판단력 등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훈련된 인재들이 창업전선에 뛰어들 때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게 이 전 부총리의 생각이다. 이영찬 골프존 회장을 비롯해 매출 1000억 원대 벤처기업을 세운 기업인 상당수가 대기업 출신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동기 서울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대기업 직원들은 직장생활을 통해 기업가 정신을 훈련받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이들은 창업 전선에 잘 나서지 않았다. 과거 실패 경험 때문이다. 벤처 붐이 일었던 2000년대 초반 대기업 직원이 대거 회사를 나와 창업했다. 신생 벤처기업에 몸을 담은 이도 많았다. 하지만 성공 사례는 드물었다.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창업하겠다고 하면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현재 매출이 2000억 원에 이르는 한 벤처기업 경영자는 “좋은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하겠다고 하니 아내가 ‘나 죽고 나서 하라’고 하더라”는 얘기를 들려줬다. 이 전 부총리는 이런 분위기를 꼬집은 것이다.
대기업 직원의 아내가 창업을 반대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사업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면 연대보증을 요구한다. 실패하면 사업만 ‘말아먹는’ 게 아니라 자신의 전 재산을 날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친인척의 재산까지 ‘털어먹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모험할 사람이 많지 않은 건 당연하다.
민간 주도 인큐베이팅 활발
최근 이런 벤처업계에서 변화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대기업 출신이 잇따라 창업 대열에 몸을 싣기 시작한 것이다. 2014년 1월부터 11월까지 국내에 설립된 신설 법인은 7만6808개에 달했다. 이미 2013년 통계를 넘어선 수준이다. 12월 설립 법인까지 포함하면 8만2000개 정도로, 사상 최대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실시간 창업률 지표가 없어 신설 법인 수를 창업지표로 사용한다. 2014년은 창업 열기가 뜨거웠던 해였다고 할 수 있다.
정보기술(IT) 버블이 있었던 2000년대 초 6만 개가 넘었던 신설 법인 수는 이후 줄어들다가 정부의 창업 지원이 살아나기 시작한 2009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신설 법인 수만으로는 질 좋은 창업이 늘었는지 알기 어렵다. 과학기술 서비스와 제조업 창업뿐 아니라 음식·숙박업, 부동산중개업 등 베이비붐 세대의 노후 대비 창업도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질 좋은 창업이 늘어난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정부의 벤처 육성 정책인 TIPS(Tech Incubator Program for Startup)에서 드러난다. ‘민간투자 주도형 기술 창업 프로그램’이라 부르는 이 정책은 이스라엘 정책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공무원이 아닌 성공한 벤처기업가 또는 벤처투자자가 투자 대상 기업을 선정해 인큐베이팅한다. 정부는 창업 자금과 연구개발 자금을 최대 10억 원까지 지원한다. 투자자들은 초기 지분에 투자하고, 성공 시 수익을 공유한다. 성공한 벤처기업가가 멘토가 되므로 성공 확률이 높은 것이 장점이다.
2013년 시작된 이 프로그램의 대상 업체로 선정된 56개 회사 대표자들을 분석해봤다. 삼성전자 출신이 12명이었고, LG전자 등 다른 대기업 출신도 많았다. 애플, 구글 등 글로벌 기업에 다니다 그만두고 창업 전선에 뛰어든 사람도 있고,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한 벤처기업인은 의사라는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모험의 길에 뛰어들기도 했다.
한정화 중소기업청장은 “TIPS 지원을 받으려면 높은 경쟁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 지원을 받은 회사들은 질 좋은 창업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한 이유는 정부가 창업 지원에 매년 조 단위 예산을 투입하고, 최근 코스닥 상장이나 해외 매각 등을 통해 대박을 터뜨린 기업이 속속 탄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뒤 글로벌 게임회사의 서울지사에 다니던 이대형 대표도 그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이 대표가 설립한 파티게임즈(‘아이러브커피’ 제작사)는 2014년 11월 코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당시 청약증거금이 1조 원이나 몰릴 만큼 화제를 모았다. 이 회사는 중국 인터넷서비스 전문업체 텐센트에서 투자금 200억 원을 유치하기도 했다.
소셜 번역 플랫폼 ‘플리토’ 개발자 이정수 대표(왼쪽).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7월 벤처기업이 밀집한 서울 금천구 대륭테크노타운을 방문해 기업 대표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최시원 조이코퍼레이션 대표, 김민철 큐키 대표, 김준용 키즈노트 대표, 이유미 엄청난벤처 대표, 박 대통령.
구글 번역기를 뛰어넘는 소셜 번역 플랫폼이라는 평가를 받는 플리토도 성공 사례로 꼽힌다. SK텔레콤에 다니던 이정수 대표가 2012년 창업한 이 회사의 번역기는 현재 세계 170개국에서 약 370만 명이 사용하고 있다. 번역을 의뢰하는 사람이 원문을 올리면, 그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 실시간으로 번역해 보내주는 방식으로, 플리토는 우리나라와 러시아 기업 등으로부터 인수 제의를 받았다.
큐키(Keukey)는 스마트폰 사용자가 오타를 편리하게 수정할 수 있는 입력장치 솔루션이자 회사 이름이다. 스마트폰에 글자를 입력하다 오타가 생길 경우 백스페이스를 연속해 누르거나 커서를 이동해 해당 글자를 지우고 다시 입력해야 한다. 큐키는 오타 뒤에 정확한 단어를 입력한 뒤 키보드를 아래로 한 번 쓸어주면 오타가 저절로 수정되는 입력장치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 졸업 후 국내 대기업에 다니던 김민철 대표가 2013년 창업한 이 회사는 서비스 출시 이전에 일본 기업 산텍으로부터 3억 원을 투자받아 화제가 됐다.
큐키는 TIPS 프로그램의 성공 사례로도 꼽힌다. 대상 업체로 선정돼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 출신인 이택경 대표가 운영하는 에인절 투자사 프라이머로부터 종잣돈을 투자받았고, 창업 직후 정부로부터 5억 원을 지원받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스마트알림장 키즈노트도 눈에 띄는 회사다. 안랩에서 개발자로 일하던 최장욱 대표가 설립한 이 회사는 어린이집 교사나 원장이 학생을 통해 부모에게 보내고 확인을 받아오게 하는 알림장을 모바일로 바꾼 서비스를 제공한다. 창업한 지 3개월 만인 2012년 7월 김범수 다음카카오 의장이 출자한 에인절 투자사 케이큐브벤처스로부터 3억 원을 투자받았고, 역시 TIPS 대상으로 선정돼 정부에서 5억 원을 지원받았다.
창조경제는 이런 성공 스토리가 쌓여 대기업-하청 중소기업-영세 소상공인으로 구성된 한국의 후진적 기업 생태계가 변화하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