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 국정 개입 문건 등을 유출한 혐의(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 및 공무상 기밀누설)를 받는 조응천 전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이 2014년 12월 31일 새벽 구속영장이 기각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을 나서 귀가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 2014년 12월 31일 조응천(52) 전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청와대는 분노했다. 영장을 기각한 엄상필 부장판사(47·연수원 23기)는 12월 11일 검찰이 ‘정윤회 동향’ 문건 사건에서 가장 먼저 구속영장을 청구했던 고(故) 최경락(46) 경위와 한모(45) 경위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인물이다. 청와대 문건을 ‘세계일보’에 건넨 혐의를 받은 최 경위는 영장이 기각돼 풀려난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 경위의 자살 이후 수사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청와대 “조응천=이간질 중죄인”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1부(부장 정수봉)와 특별수사2부(부장 임관혁)는 2014년 12월 27일 조 전 비서관에 대해 ‘정윤회 동향’ 문건 등 청와대 문건의 무단 반출을 지시하고 공무상 비밀을 박지만 EG 회장에게 전달한 혐의(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 및 공무상 비밀누설)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이자 고소인인 청와대는 그동안 이 사건을 ‘역적 조응천의 난’으로 규정하고 최대한 신속한 처벌을 원했다.
조 전 비서관과 문건 작성자 박관천 경정(48·전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구속)은 허위 문건으로 박근혜 대통령 동생인 박 회장에게 비선 보고했고, 문건이 언론에 흘러들어가도록 해 청와대 내부를 이간질한 중죄인이라는 게 청와대의 시각이다. 박 대통령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12월 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 사건을 ‘국기문란 행위’라고 발언한 것도 이런 기류를 반영한 것.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려 했던 검찰은 구속영장 기각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당장 청와대의 압박 때문에 무리한 수사를 벌인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 박 경정이 서울지방경찰청 정보1분실로 보낸 두 상자 분량의 청와대 문건의 대량 반출에 조 전 비서관의 지시가 있었느냐가 수사의 관건. ‘박 경정의 1인 자작극’으로 수사를 마무리하려던 검찰은 수사 기간을 연장하면서 박 경정이 유출한 문건과 관련 없는 별개의 문건을 조 전 비서관이 박 회장에게 보고했다는 혐의를 찾아냈다. 사실상 ‘별건 수사’를 한 것.
‘의도적 영장 기각’이라는 의혹도 불거져 나왔다. 검사 출신인 조 전 비서관을 검찰이 의도적으로 지켜준 게 아니냐는 것. 조 전 비서관이 문건 상자 반출에 개입한 정황이 있음에도 유독 이 부분에 대해서만 검찰이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 전 비서관은 사건 직후인 12월 1일 언론 인터뷰에선 “박 경정에게 ‘(경찰로 복귀한 뒤에도) 박 회장 관련 업무에서는 나를 계속 챙겨줘야 한다’고 했더니 박 회장과 관련해 자신이 작성했던 문건만 출력해 들고 나갔다고 하더라”며 반출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하지만 검찰 수사가 박 경정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는 도중인 11일 인터뷰에선 “(청와대 내부 문건이) 유출된 거라면 나는 완전히 속은 것”이라고 했다.
박 경정이 문건 상자 반출 혐의를 벗기 위해 거짓으로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문서 유출 경로 보고서’도 조 전 비서관을 통해 올라갔지만 검찰은 박 경정에게만 무고 혐의를 적용했다. “청와대를 의도적으로 속였다”는 정치적 부담을 조 전 비서관에게 주지 않은 셈이다.
검찰 핵심 관계자는 “법원이 ‘구속 수사의 필요성과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려움’을 기각 사유로 밝힌 만큼 혐의 내용이 아닌 구속 수사의 필요성에 대해 법원과 시각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면서 “조 전 비서관의 범죄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충분하기 때문에 공판 과정을 지켜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달여간의 검찰 수사를 통해 ‘정윤회 동향’ 문건과 ‘박지만 미행 문건’의 진위, 문건 유출 경로는 거의 다 확인됐다. 특히 그 과정에서 권력 내부의 치열한 암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박 대통령의 레임덕까지 거론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먼저 ‘정윤회 씨가 비선으로 국정 개입을 했다’는 내용의 문건 작성과 유출을 주도한 혐의를 받는 조 전 비서관이 정작 자신도 대통령의 동생과 통하는 비선을 만들어 공무상 비밀을 건네 온 정황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검찰은 문건을 작성한 박 경정을 12월 19일 구속한 뒤 문건 작성과 반출에 직속상관인 조 전 비서관의 지시가 있었는지를 추궁했다. 검찰은 박 경정의 뇌물수수 의혹 내사 카드까지 꺼내들고 압박했다. “박 경정이 룸살롱 업주 등으로부터 수억 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첩보에 대해 내사하고 상당 부분 관련 증거를 확보해 돈의 용처 수사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박 경정은 오히려 “문건들은 박 회장이 원해서 만들어 가져다준 것”이라는 취지의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에 검찰은 박 회장의 측근 전모(39) 씨를 소환해 문건과 정보가 박 회장 쪽으로 넘어간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했고, 곧바로 박 회장도 비밀리에 다시 소환했다. 1차 조사 때 극도로 말을 아꼈던 박 회장은 2차 조사에선 조 전 비서관의 비선 보고 사항을 일부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 측 관계자는 “박 회장은 누나(박 대통령과 정부)에게나, 측근인 조 전 비서관에게나 부담을 지우지 않길 원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전했다.
절반만 드러난 ‘비선 vs 비선’
2014년 12월 10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출석한 정윤회 씨(왼쪽)와 12월 15일 출석한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EG 회장.
검찰은 이미 ‘십상시(十常侍)’ 모임이나 박 회장 미행 등 정씨 관련 문건 내용을 모두 허위로 결론 내렸다. 결국 조 전 비서관과 박 경정이 대통령 동생의 비선을 자처하며 가짜 정보로 박 회장의 눈과 귀를 가렸고, 청와대 내부를 이간질하는 내용의 보고서로 정권 분열까지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검찰은 조 전 비서관 등이 박 회장을 등에 업고 각종 공직 인사에 개입했는지, 인사 다툼에서 밀리자 이재만 대통령총무비서관 등 이른바 ‘청와대 3인방’을 제거하기 위해 문건을 작성했는지 등 다른 의혹도 확인할 방침이다.
하지만 조 전 비서관이 “(내용의) 6할 이상은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던 정씨의 비선 개입 의혹도 완전히 규명되진 못했다. 검찰 수사는 문건에 적시된 시기가 포함된 2013년 12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3개월간 정씨가 3인방 등 비서진과 통화한 기록, 서울 강남 중식당에서 회동했는지 여부에 집중돼 있었다. 정씨가 또 다른 인물을 통해 국정 개입을 했다든지, 3인방을 팔아 이권에 개입했다든지 하는 의혹들은 이번 수사 영역에선 비켜나 있다. 따라서 검찰 수사가 끝나도 당분간 ‘박지만의 비선’과 ‘정윤회의 비선’ 간 보이지 않는 대결 구도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