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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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 중독 작곡자의 최후 모습

일리야 레핀이 그린 무소륵스키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4-12-01 10: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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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코올 중독 작곡자의 최후 모습

    ‘무소륵스키의 초상’, 일리야 레핀, 1881년, 캔버스에 유채, 69×57cm,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이 초상화는 누가 봐도 예술가의 초상답지 않다. 헝클어진 머리에 정돈되지 않은 옷차림,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임을 알려주는 붉은 코…. 오직 허공을 응시하는 형형한 눈동자만이 이 알코올 중독자가 한때는 범상치 않은 지성의 소유자였음을 알려준다. 초상화 주인공은 러시아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1839~1881)이며, 그림을 그린 이는 19세기 최고의 러시아 화가로 손꼽히는 일리야 레핀(1844~1930)이다.

    왜 레핀은 무소륵스키의 초상화를 이토록 심란하게 그린 것일까. ‘전람회의 그림’을 작곡한 무소륵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 발라키레프, 보로딘 등과 함께 러시아 국민악파 5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작곡가다. 심지어 그는 여느 작곡가들보다 훨씬 더 좋은 집안 배경을 갖고 있었다. 무소륵스키의 부모는 교양 있는 대지주이자 귀족이었다. 어린 시절 무소륵스키는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실력이 일취월장해 리스트의 연습곡 같은 난해한 곡도 어렵지 않게 연주했다.

    열세 살이 된 무소륵스키는 집안 전통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사관학교의 경직되고 가혹한 규율은 예민한 소년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고, 여기서부터 무소륵스키를 일생 동안 괴롭힌 알코올 중독의 기미가 싹트기 시작한다. 결국 학교를 중퇴한 무소륵스키는 발라키레프에게 음악을 배우며 작곡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지만, 생계를 위해 하급 관리로 취직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러시아 농노가 해방되면서 영주였던 그의 집안이 몰락해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865년 어머니가 사망해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때부터 그의 길지 않은 인생은 생활고, 알코올과의 싸움으로 점철되다시피 한다.

    작곡가로서 무소륵스키의 재능은 결코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친구인 화가 하르트만의 죽음을 기념해 쓴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과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관현악곡 ‘민둥산의 하룻밤’ 등은 모두 러시아의 야성적 색채와 강렬함을 담은, 러시아 국민악파 중에서도 가장 러시아적 전통에 충실한 명곡들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작품 대부분은 생전에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야성적 색채가 지나치게 강하고 거칠어 누군가가 다듬어주지 않으면 세상에 내놓기 창피한 곡들로 인식됐던 것이다. 하급 관리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 간신히 완성한 ‘보리스 고두노프’를 비롯한 몇 편의 오페라는 상연 기회조차 잡지 못하거나, 하이라이트 몇 장면이 두어 번 무대에 오르는 정도에 그쳤다.



    작곡에 시간을 빼앗기는 데다 알코올 중독 성향까지 갖고 있었으니 무소륵스키의 직장 생활 역시 순탄할 리 만무했다. 결국 30대 후반부터 무소륵스키는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중증 알코올 중독 환자가 돼버렸다. 광증까지 겹치면서 직장에서 해고된 그는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지와 똑같은 상태’로 거리를 헤매다 요행히 한 군인병원에 입원했다. 레핀의 초상화는 바로 이때, 군인병원의 초라한 병실에 머물고 있는 무소륵스키를 담은 것이다.

    레핀은 옛 동료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면서 서둘러 이 초상화를 스케치했다. 그리고 2주 후 다시 그를 찾아갔지만, 병원 측은 면회를 허락지 않았다. 무소륵스키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코냑 한 병을 모두 들이켜고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 병원 측 설명이었다. 이 최후의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비운의 작곡가 무소륵스키는 1881년 3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레핀이 초상화를 그린 지 23일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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