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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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가 그린 메리 커샛

절친 동료이자 남여 사제지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연정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4-10-20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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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가가 그린 메리 커샛

    ‘루브르에 있는 메리 커샛’, 에드가르 드가, 1880년, 파스텔, 개인 소장.

    이것이 그에게 행운인지 아니면 불행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미국 여성화가 메리 커샛(1844~1926)의 화가로서 삶은 에드가르 드가(1834~1917)와 분리할 수 없는, 매우 견고한 관계로 묶여 있었다. 물론 화가들 사이 친분 관계가 각자의 작품 세계에 적절한 자극이 된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커샛과 드가의 관계는 단순히 ‘동료로서의 친분’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동료이자 선후배, 스승과 제자인 동시에 서로를 연모하고 미워하는 관계였다.

    미국 피츠버그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 출신인 커샛은 그림을 공부하려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왔다. 몽마르트르에 화실을 얻어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던 그는 1877년 드가를 처음 만나게 된다. 첫 만남에 대해 커샛은 “그 만남으로 내 삶이 바뀌었다”고 회상했고, 드가 역시 “나와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는 화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으니, 두 사람의 예술관이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때마침 둘의 화실은 몽마르트르에 바로 이웃해 있었고, 커샛은 판화 기법을 배우고자 매일 드가의 화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도시 풍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인의 모습을 현대적 필치로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에 대해 두 화가의 의견은 완전히 일치했다. 인상파전에 매년 열심히 참여했으면서도 여느 인상파 화가와 달리 야외 풍경을 그리는 데 관심이 없던 것 역시 둘의 공통점이었다. 드가는 도시인, 특히 부유층 남녀의 세련되면서도 속물적인 근성을 캔버스에 담는 예리한 화풍으로 이름을 날렸고, 이런 드가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커샛은 늘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드가와 커샛은 모두 은행가 집안에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성장했는데, 이런 집안 배경 역시 두 사람이 밀접하게 연결되는 고리로 작용했다.

    커샛이 드가의 제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드가의 아류에만 머물렀던 건 아니다. 그는 드가의 초상화들이 지나치게 냉정하고 신랄하기만 할 뿐, 대상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와 엄마를 모델로 따스한 모성애를 담은 초상화를 연달아 제작하면서 커샛의 작품 세계는 점점 더 드가와 궤적을 달리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1894년 ‘드레퓌스 사건’ 때 서로의 정치적 견해차가 드러나면서 드가와 커샛은 매우 소원해지고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 예술가로서의 동료 의식 외에 남녀 간 애정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공교롭게도 둘은 모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동료 화가들은 둘 사이에 흐르는 어떤 친밀한 기류를 감지했으나, 드가와 커샛은 어떤 자리에서도 서로에게 사사로운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둘의 편지에도 서로에 대한 언급이 교묘히 빠져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으려 조심했던 듯싶다.



    그러나 드가가 커샛과 그의 동생 리디아를 그린 ‘루브르에 있는 메리 커샛’을 보면 커샛에게 가졌던 어떤 은밀한 연정이 느껴진다. 그림 속에서 가이드북을 읽는 동생을 뒤로한 채 루브르의 작품 세계에 푹 빠져 있는 날씬한 숙녀가 커샛이다. 작품 분위기는 드가의 여느 초상화와 달리 온화하고 따스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커샛은 매우 지적인 여성처럼 보인다. 평생 교우관계에 무척 서툴렀던 드가가 이런 식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에둘러 표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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