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담 지음/ 글항아리/ 440쪽/ 1만8000원
봄이다. 도시 봄은 숲과 들을 거쳐 뒤늦게 찾아온다. 봄을 온전히 느끼려면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 생명 에너지를 마음껏 호흡하는 데도 조그마한 노력이 필요하다. 농촌이나 숲 가까이에 사는 사람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누구보다 빨리 봄을 읽는다. 강원 고성 인근 숲에서 20년째 사는 소설가인 저자도 마찬가지. 사계절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강원도 방언으로 담담하게 스케치한다.
숲에 가면 사계절 내내 수많은 동식물을 만날 수 있다. 크게는 노루, 뱀, 멧돼지 같은 동물과 마주치고, 작게는 땅에 포복한 이름 모를 수많은 풀꽃과 눈인사할 수 있다. 저자처럼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숲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사연이 말을 걸어온다.
홀로 산길을 걷다 사람 몸집만한 멧돼지와 맞닥뜨리면 어떤 공포가 밀려올까. 산길에서 만나는 멧돼지는 먹이를 찾아 도시로 내려오는 황당한 멧돼지만큼이나 위협적이다. 특히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갑자기 튀어나온 멧돼지는 사람 간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새끼 멧돼지는 다르다. 어느 날 다람쥐처럼 등에 갈색 줄무늬가 선명한 새끼 멧돼지가 수로에 빠졌다가 사람 손에 붙들려 왔다. 비를 맞아서인지, 아니면 가혹한 운명을 알아챘는지 바들바들 떨었다.
논밭을 어지럽히는 동물은 농부에게 공공의 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의 책임이 더 커 보인다”고 반문한다. 산 기스락 논밭에 전기울타리를 치고, 올무와 쐐기를 놓은 채 만나는 족족 때려잡으니, 인간이 먹이그물망에 코를 빠뜨린 격이라는 것이다.
“청개구리들이 벽과 창문을 기어오르는 일이 잦더니 억수장마가 시작됐다. 빗줄기는 가늘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뚝비였다. 그사이 옥수수를, 차를, 밥을 먹어도 빗소리는 한결같았다. (중략) 덤부렁듬쑥한 수풀에서 해오라기가 날아오르고, 뒤 미처 둑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고라니였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는지 다시 또 개처럼 울었다.”
여름은 풍요의 계절이다. 하지만 논밭 근처 또는 숲정이에서 아무것이나 뜯거나 캐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농사를 짓는 곳이면 어디든 살충제와 제초제를 막무가내로 뿌려대기 때문이다. 문제는 농약을 쓰면 쓸수록 동식물에게 내성이 생겨 점점 더 독한 농약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시골 어른도 이런 악순환을 알지만 끊기가 쉽지 않다. 뾰족한 대안도 없기에 저자의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어쨌든 멀지 않아 숲에 가면 골짜기마다 꽃봉오리가 터져 나오는 황홀한 봄의 소리가 펼쳐질 것이다. 인간이 고요함 속에서 숲이 변해가는 모습을 알아채기란 어렵다. 숲에 기대어 사는 사람, 숲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숨겨진 모습을 조금 내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2007년 가을부터 2012년 가을까지 쓴 숲과 사람에 대한 관찰 일기는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흥미롭고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