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입니다. 그 즈음에 태어난 이들에게 물어보니 ‘6월 항쟁’을 모르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당시를 돌이켜보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6월 항쟁’의 피와 땀과 눈물로 쟁취한 것입니다. 여전히 민주주의는 진행형으로 성숙해가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6월 항쟁’ 의미와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급박한 당시 현장 치밀하게 재구성
1987년 당시 동아일보 법조팀장이던 황호택 동아일보 고문(전 논설주간·사진)이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블루엘리펀트)을 출간했다. 황 고문은 “한 대학생의 죽음이 철옹성 같던 전두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속보를 30년 만에 다시 쓴다는 생각으로 보충 취재했다”고 말했다. 황 고문은 당시 취재기자와 수사 관련자, 제보자들을 다시 만나고 자료를 수집해 급박하던 현장을 치밀하게 재구성했다.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데는 회유와 협박,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냈던 내부 고발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책을 쓰면서 새로 발굴한 팩트가 있다고 들었다.
“1987년 1월 14일 저녁 8시 무렵, 당시 최환 공안부장은 치안본부 경찰관 2명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경찰관들은 최 부장에게 ‘아버지 박정기 씨로부터 합의서를 받았다’며 ‘박씨가 오늘밤에라도 화장해 유골 가루를 달라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가족과 합의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죠.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은 그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직원 3명을 부산으로 보냈고, 그들은 박씨와 밤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습니다. 박씨는 1월 15일 새벽 서울 용산역에 내렸는데 그때까지 아들이 죽은 줄 몰랐어요. 경찰이 거짓 보고를 하고 빨리 화장해 고문치사의 결정적 증거를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최 부장이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 밖에도 6월 항쟁 당시 민병돈 특전사령관이 ‘군이 시위를 진압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보안사령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했다는 사실도 인터뷰를 통해 밝혀냈습니다.”
▼박종철 씨와 관련된 자료도 수집했다고.
“박종철 씨의 롤모델은 형 종구 씨로, 동생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강대에 다니던 종구 씨는 반정부시위에 앞장서다 경찰서를 들락거리곤 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종철 씨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철 씨는 굉장히 원칙주의자였다고 해요. 예전 농촌활동(농활)을 가면 농민들이 새참을 주는데, 다른 학생들은 먹었지만 종철 씨는 끝까지 먹지 않았답니다. 농민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면서요.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에 연행됐을 때 종철 씨가 선배 박종운 씨의 행적을 적당히 댔더라면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고문이 상상을 초월했다고.
“고문은 상시적으로 비일비재하게 벌어졌습니다. 대학생과 일반인은 물론, 국회의원도 끌려가 맞고 고문을 당했죠. 신문사 편집국장도 본보기로 손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상습적으로 보도지침을 위반하면 불려갔는데, 쓰지 말라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보도지침은 무엇인가.
“5공화국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은 거의 매일 각 언론사에 기사 보도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작성해 시달했습니다. 언론의 보도 제작까지 정부기관이 개입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는데, 사실상 청와대와 당시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도 관여했습니다.”
1987년 1월 15일자 ‘동아일보’ 지방판 사회면. 박종철 씨 사망 첫 보도는 놓쳤지만,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로 ‘대학생 경찰 조사받다 사망’ 제목을 단 5단 기사가 실렸다.
사망한 박씨의 얼굴 사진도 함께 보도했다. 지방판은 당국 감시가 느슨한 점을 이용해 보도지침을 무시하고 기사를 키운 것이다. 이튿날 16일자에는 ‘오른쪽 폐에서 탁구공 크기의 출혈’ ‘목과 가슴 주위에 피멍 많았다’고 전하며 고문치사임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1월 19일자(당시 석간)는 1면부터 사회면까지 5개 면에 걸쳐 고문치사 사건 사실 규명과 고문 추방 캠페인 기사로 채워졌다.
▼분위기가 험악했는데, 진실보도가 어렵지 않았는지.
“당시 동아일보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실보도에 한마음 한뜻이었습니다. 회사는 정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치고 빠지는 전략을 썼습니다. 당시 남시욱 편집국장은 “만약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박군 사건은 끝까지 파헤쳐야 한다”고 부국장에게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취재기자였다는 사실이 자부심이자 행운이었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제대로 다룬 석간 동아일보는 가판에서만 40만 부 팔려나갔습니다. 가정배달 60만 부에 가판까지 합하면 100만 부나 나간 겁니다. 그만큼 국민은 진실보도와 민주화에 목말라 있었고, 그런 갈증이 결국 전두환 권위주의체제를 무너뜨렸습니다.”
동아일보 1년 뒤 추적보도 또 특종
▼탐사보도와 기자정신이 이룬 개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소설가는 상상으로 글을 쓰고 기자는 발로 글을 씁니다. 당시 황열헌 동아일보 기자는 다른 기자들이 ‘기사도 안 나갈 텐데 뭐 하러 가느냐’고 말하는 와중에도 종철 씨의 시신을 화장하는 벽제화장터를 취재해 1987년 1월 17일자 ‘창(窓)’이란 코너에 기사를 썼어요.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라던 아버지 박씨의 마지막 말은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대학 시위대의 플래카드에도 쓰였습니다. 올해 3월 24일 박씨를 다시 찾아뵀습니다. 88세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기억력은 여전했어요.”
치안본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치밀하게 축소 조작하고 회유하려던 사실이 1년 뒤 동아일보 추적보도를 통해 추가로 드러났다. 당시 부검의였던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박사는 1월 16일 일기에 ‘사실이 밝혀지고 있구나 하는 판단을 했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감정서만은 사실대로 기술해야겠다고 결심’이라고 적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황 박사에게 ‘고문당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쇼크사로 적어라’고 거짓 소견서를 쓰라고 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강 치안본부장은 이 일로 구속됐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가 오늘날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어떻게 국가가 학생을 불러다 물고문을 해 죽일 수 있나’ 하는 국민의 분노를 촉발했습니다. 또한 한 대학생을 죽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정권이 범행을 조작 및 은폐하려 한 시도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겁니다. 5공 정권 전후 12·12 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고문을 당했어요. 시국사건이라는 이유로 영장 없이 끌고 가 두들겨 패기도 했습니다. 종철 씨를 고문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가 죽은 줄 몰랐어요.
그래서 내과전문의 오연상 씨를 불러 응급조치를 한 겁니다. 만약 종철 씨가 죽은 줄 알았더라면 경찰은 또 하나의 의문사로 처리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민주주의라 해도 결함은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려면 국민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동아일보의 생생한 특종이 없었다면 민주화는 더 늦어졌거나 더 많은 희생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의 출간 의미는 깊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주최하는 저자의 북콘서트는 6월 7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