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장을 떠나면서
비행장을 떠나면서 나는 울었고 너도 울었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우울한 신문들을 읽었고
참한 소설 속을 걸어다니며 수음을 했지
사랑이 떠나갔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의 가슴에서는 사막이 튀어나왔는데
사막에 저리도 붉은 꽃이 핀다는 건 아무도 몰라서 꽃은 외로웠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들을 향해 인사를 했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지상에 쌓아놓은 모든 신문들에게 불안한 악수를 청했어
울지 마, 라고 누군가 희망의 말을 하면
웃기지 마, 라고 누군가 침을 뱉었어
21세기의 새들은 대륙을 건너다가 선술집에 들러 한잔했지
21세기의 모래들은 대륙과 대륙에 새 집을 짓다가 스시집에 들러
차가운 생선의 심장을 먹었어
21세기의 꽃게들은 21세기의 모기들은 21세기의 은행나무들은
인사를 하지 않는 시간을 위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지
21세기의 남자들은 21세기의 여자들은 아이들은 소년과 소녀들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사막에 핀 붉은 꽃을 기어이
보지 못했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꽃이 질 때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헌 여행을 잊어버렸지, 지겨운 연인을 지상의 거리, 어딘가에 세워두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슬프면서도 즐거웠지
―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에서
슬프면서도 즐거운 이별
공항은 이상한 공간이다. 오는 사람도 있고 가는 사람도 있는 곳. 아무도 오랫동안은 머무르지 않는 곳. 이별과 재회가 동시에 일어나는 곳. 누군가는 곧 하늘을 향해 솟구칠 예정인 곳. 기쁨과 슬픔에서부터 설렘과 안쓰러움까지, 동시에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곳. 무엇보다 시간이 금쪽같은 곳.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소중한 사람이 훌쩍 가버리는 곳. 끝판에는 마음이 활주로처럼 텅 비게 되는 곳.
나는 오늘 떠나기로 돼 있다. 이번 여행은 아마 1년 정도 걸릴 것이다.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지금까지 해왔던 “헌 여행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21세기의 남자”처럼 인사법을 새로 배우고 그 환경에 금세 익숙해질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건너다가” 아래를 멀거니 내려다보기도 하겠지. 친구들의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힌 수첩을 펼쳐 얼굴을 파묻기도 하겠지.
하늘을 날아 여기에서 저기로, 혹은 저기에서 여기로 이동한다는 사실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 하늘 아래에서는 오늘이 저 하늘 아래에서는 어제거나 내일일 수도 있어. 너를 이제 쉽게 보기는 힘들 거야. 나는 네게 무덤덤하게 말한다. 하늘이 높고 아득하다. 공항은 여느 정류장과는 다르므로. 한 번 지나치면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으므로. 나는 잠시 너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을 거야. 그래도 “울지 마.” 너는 눈을 훔치며 대답한다. “웃기지 마.” 그 모습이 처연해 “나는 울었고 너도 울었”다. 눈이 벌게진 채로 도망치듯 게이트를 겨우 빠져나왔다.
비행기에 올라탄 후 내가 여기 없을 그 시간을 찬찬히 헤아려본다. 나는 이방인의 신분으로 골목골목을 비집고 들어갈 거야. 그때도 너는 웃고 떠들고 슬퍼할 테지. 나는 거기서도 “커피를 마시며 우울한 신문”을 읽을 거야. 뒷모습이 너와 똑같은 사람을 보고 나도 모르게 어깨를 툭 칠지도 모르지. 네가 아닌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가 “사막에 핀 붉은 꽃”처럼 외로워질지도 모르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나는 “슬프면서도 즐거웠지”. 너와 헤어져 슬펐지만, 낯선 곳을 모험한다는 생각에 한껏 들뜨기도 했지.
그리고 거짓말처럼 1년이 훌쩍 흐른다. “지겨운” 풍경들이 살갗처럼 그리워질 때, 나는 달랑 그림자만 끌고 불쑥 돌아온다. 여전히 21세기라 다행이다.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을 때, 나는 미끄러지듯 생각한다. 너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처음으로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나는 여행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아니면 그저 안녕하고 싶어서.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비행장을 떠나면서 나는 울었고 너도 울었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우울한 신문들을 읽었고
참한 소설 속을 걸어다니며 수음을 했지
사랑이 떠나갔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의 가슴에서는 사막이 튀어나왔는데
사막에 저리도 붉은 꽃이 핀다는 건 아무도 몰라서 꽃은 외로웠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들을 향해 인사를 했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지상에 쌓아놓은 모든 신문들에게 불안한 악수를 청했어
울지 마, 라고 누군가 희망의 말을 하면
웃기지 마, 라고 누군가 침을 뱉었어
21세기의 새들은 대륙을 건너다가 선술집에 들러 한잔했지
21세기의 모래들은 대륙과 대륙에 새 집을 짓다가 스시집에 들러
차가운 생선의 심장을 먹었어
21세기의 꽃게들은 21세기의 모기들은 21세기의 은행나무들은
인사를 하지 않는 시간을 위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지
21세기의 남자들은 21세기의 여자들은 아이들은 소년과 소녀들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사막에 핀 붉은 꽃을 기어이
보지 못했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꽃이 질 때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헌 여행을 잊어버렸지, 지겨운 연인을 지상의 거리, 어딘가에 세워두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슬프면서도 즐거웠지
―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에서
슬프면서도 즐거운 이별
공항은 이상한 공간이다. 오는 사람도 있고 가는 사람도 있는 곳. 아무도 오랫동안은 머무르지 않는 곳. 이별과 재회가 동시에 일어나는 곳. 누군가는 곧 하늘을 향해 솟구칠 예정인 곳. 기쁨과 슬픔에서부터 설렘과 안쓰러움까지, 동시에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곳. 무엇보다 시간이 금쪽같은 곳.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소중한 사람이 훌쩍 가버리는 곳. 끝판에는 마음이 활주로처럼 텅 비게 되는 곳.
나는 오늘 떠나기로 돼 있다. 이번 여행은 아마 1년 정도 걸릴 것이다.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지금까지 해왔던 “헌 여행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21세기의 남자”처럼 인사법을 새로 배우고 그 환경에 금세 익숙해질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건너다가” 아래를 멀거니 내려다보기도 하겠지. 친구들의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힌 수첩을 펼쳐 얼굴을 파묻기도 하겠지.
하늘을 날아 여기에서 저기로, 혹은 저기에서 여기로 이동한다는 사실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 하늘 아래에서는 오늘이 저 하늘 아래에서는 어제거나 내일일 수도 있어. 너를 이제 쉽게 보기는 힘들 거야. 나는 네게 무덤덤하게 말한다. 하늘이 높고 아득하다. 공항은 여느 정류장과는 다르므로. 한 번 지나치면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으므로. 나는 잠시 너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을 거야. 그래도 “울지 마.” 너는 눈을 훔치며 대답한다. “웃기지 마.” 그 모습이 처연해 “나는 울었고 너도 울었”다. 눈이 벌게진 채로 도망치듯 게이트를 겨우 빠져나왔다.
비행기에 올라탄 후 내가 여기 없을 그 시간을 찬찬히 헤아려본다. 나는 이방인의 신분으로 골목골목을 비집고 들어갈 거야. 그때도 너는 웃고 떠들고 슬퍼할 테지. 나는 거기서도 “커피를 마시며 우울한 신문”을 읽을 거야. 뒷모습이 너와 똑같은 사람을 보고 나도 모르게 어깨를 툭 칠지도 모르지. 네가 아닌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가 “사막에 핀 붉은 꽃”처럼 외로워질지도 모르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나는 “슬프면서도 즐거웠지”. 너와 헤어져 슬펐지만, 낯선 곳을 모험한다는 생각에 한껏 들뜨기도 했지.
그리고 거짓말처럼 1년이 훌쩍 흐른다. “지겨운” 풍경들이 살갗처럼 그리워질 때, 나는 달랑 그림자만 끌고 불쑥 돌아온다. 여전히 21세기라 다행이다.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을 때, 나는 미끄러지듯 생각한다. 너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처음으로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나는 여행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아니면 그저 안녕하고 싶어서.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