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가 1982년 출범 이래 최초로 한 시즌 ‘600만 관중’을 달성한 9월 13일, SK와 넥센의 경기가 열린 인천 문학야구장을 찾은 관중이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이 짧은 장면은 현재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왜 가장 뜨거운 스포츠인지, 이 어마어마한 팬덤(fandom)의 힘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를 잘 보여준다. 팀을 넘나드는 인간적인 정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심수창이라는 미남 선수에 대한 관심 때문만도 아니다. 한 선수가 그려온 궤적이 성적과는 별개로 또 하나의 감동적인 서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2011년 프로야구 팬덤의 가장 독특한 지점이다.
연고제 1차 지명권 폐지의 연쇄효과
솔직히 말하자면 그 무슨 어휘를 동원해가며 우회적으로 표현하려 해도 프로야구 팬덤의 기저에 지역감정이 튼튼히 뿌리박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지금이야 태어난 곳을 기준으로 자기 팀을 갖는 것을 ‘쿨’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정서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부산이 고향인 사람에게 롯데는 ‘꼴데’이던 시절에도 애증의 ‘우리 팀’이었고, 1980~90년대 해태 왕조는 전라도 사람에게는 현실의 상실감을 극복하게 해주는 단 하나의 오아시스였다. 상대팀의 순위가 어떻든 두산과 LG가 언제나 라이벌 정서를 바탕으로 싸우는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잠실구장을 공유하는 서울 연고의 두 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뿌리가 KIA 타이거즈 팬을 ‘홍어’라고 비하하는 지역차별적 정서로 이어지는 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지만, 지역차별과 지역감정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연고지에 대한 프라이드가 촌스러울지는 몰라도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프로스포츠가 뿌리내리는 데 그보다 더 튼튼한 토양은 없다. 세계 3대 축구리그를 지닌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를 보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시티의 맨체스터 더비, AC밀란과 인터밀란의 밀라노 더비,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 클라시코 더비는 모두 지역감정에서 출발한 전쟁 같은 라이벌전이다.
‘아내는 바꿀 수 있어도 축구팀은 바꿀 수 없다’는 영국 스포츠팬의 구호를 가장 비슷하게 연결할 수 있는 한국의 문화상품은 축구팀이 아닌 프로야구팀이다. 영국 축구팬의 경우 국가대표의 월드컵 성적보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프리미어리그 성적이 더 중요한 데 비해, 한국 축구에서는 거의 모든 관심이 국가대표팀에만 쏠리고 정작 국내 팀의 순위에는 관심이 적지 않은가. 이러한 K리그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국내 프로야구 팬덤이 왜 그토록 튼튼한지 짐작할 수 있는 단초가 풀린다.
그러나 팬덤이 종교적 맹신을 넘어 다양한 논의를 가능케 하는 하나의 문화가 되려면, 먼저 우리 팀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넘어서야 한다. 2011년의 프로야구 팬덤이 그 어느 때보다 흥미로운 이유는 그토록 단단한 기반을 갖춘 팬덤이 단순히 응원을 넘어 야구 자체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방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오빠’를 응원하던 아이돌그룹 팬이 어느 틈엔가 후크송 작곡 방식이나 K팝 시장 전체에 대한 혜안을 갖게 된 셈이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이 승승장구하거나 치열한 한일전을 펼칠 때 우리 팀이 이기기를 바라는 건 쉽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임창용이 이치로와 왜 승부를 펼쳐야 하는지, 그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등 경기 후 발생하는 수많은 논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프로스포츠 가운데 가장 복잡한 룰과 전술을 가진 야구를 공부해야만 한다. WBC 선전을 비롯한 외부적 요인 덕분에 2008년부터 꾸준히 늘어난 신규 야구팬은 기존의 지역연고 팬덤을 학습하는 동시에 야구 자체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야구 아는 여자’ 같은 입문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여성으로 대표되는 초보 팬의 증가는 야구에 대한 쉽고 체계적인 설명에 대한 수요를 폭발시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존의 팬덤 역시 전투적이고 배타적이기만 한 과거 방식을 고집할 수 없게 됐다. 특히 2010년부터 연고제 1차 지명권 자체가 사라지면서 더는 그 팀이 그 지역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해졌다. 그렇다면 새로운 팬을 우리 팀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뿐이다. 왜 우리 팀의 야구가 다른 팀보다 재미있는지, 다른 팀을 놔두고 왜 우리 팀을 좋아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지역연고를 통해 30여 년 동안 누적된 프로야구에 대한 담론은 좀 더 게임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야구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토론도 단순히 우리 팀이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수준을 넘어 데이터를 분석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SK 김광현의 얼굴이 좋아 ‘야구 팬질’을 시작했다면, 그가 결코 류현진에 비해 과대평가된 선수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평균 자책점 같은 개념을 공부해야 한다.
즐기는 방식마저도 즐겁다면
8월 18일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와 SK 와이번 스 경기에서 SK 팬이 김성근 감독 경질에 대해 항의성 플래카드를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표현하지만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 대부분이 드라마 평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야구에서는 일어난다. 얼마 전 김성근 감독을 경질한 SK에 대한 팬의 반응을 보라. 그들에게 김 감독은 그저 SK를 거친 한 명의 감독이 아니라 지금의 SK가 SK 야구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롯데의 신임감독인 양승호는 롯데 특유의 화끈한 야구를 살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즌 초반 팬의 엄청난 압박을 받아야 했다.
앞서 언급한 심수창의 경우도, LG 팬은 그가 이어오던 18연패뿐 아니라 팀이 8위를 기록했던 2006년 암흑기에 그가 건져 올린 10승도 함께 기억한다. 승수를 기록하지 못한 786일이라는 숫자와 함께 그동안 가려져 있던 데이터 밖 이야기, 즉 잘 던지고도 타선이 침묵하거나 불펜이 승리 여건을 날려먹었던 불운 역시 고려할 줄 아는 것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래 승부는 언제나 치열했다. 그럼에도 2011년 프로야구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면 팬 모두가 그 승부의 서사를 서로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 됐기 때문이다. 혹은 그 서사에 직접 뛰어드는 주체가 됐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데, 그것을 즐기는 방식까지 재미있게 발달한 텍스트가 있다면 과연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아예 보지 않는다면 빠지지 않을 수도 있다. 2011년 현재 프로야구 팬이 아닌 채로 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프로야구를 보면서도 야구에 미치지 않기가 쉽지 않은 일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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