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6

..

이제니의 ‘창문 사람’

  • 입력2011-02-28 11:0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시가 밥 먹여주냐!” ‘시’라고 하면 십중팔구 이런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와 상관없이 시는 한 번쯤 품을 만한 것이다.

    시가 일상의 틈새를 뚫고 가슴에 박히는, 귀하디귀한 순간으로 평생을 지탱할는지 모른다. 시인 오은의 ‘vitamin 詩’를 격주로 연재한다.


    이제니의 ‘창문 사람’
    이제니의 ‘창문 사람’

    나는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쪽을 보고 말았다. 너는 이쪽을 보려고 했다. 그래서 이쪽을 볼 수 없었다. 창문이 하나 있고 조금 그립습니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는 사람이니까 거리를 달리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너는 창문 밖에 서 있는 사람. 한번 창문 사람이면 영원한 창문 사람이다. 카렌다 레코다 기카이다. 도케이 시케이 만포케이. 메이레이 시레이 한레이. 기어이 운율을 맞추고야 마는 슬픈 버릇. 너는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다. 슬픔은 아무도 달래줄 수 없을 때에 진정 아름다운 법이지요. 나는 울지 않는 사람이니까 거리를 달리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을 불 줄 몰랐지만 쉬지 않고 휘파람을 불었다.

    ―‘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0)에서



    ‘첫’이라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처음이 주는 두근거림과 환희에 대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설렘과 걱정에 대해. 난생처음 말을 떼고, 내 마음대로 문장을 만들어 입 밖으로 내보냈던 순간에 대해. 처음으로 말에 의미를 담아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전달했던 순간에 대해. 그 순간이 안겨준 애틋함과 달콤함과 짜릿함에 대해. 흡사 마지막처럼 내 인생을 수놓았던 무수한 ‘첫’에 대해.

    말만 들어도 가슴을 뒤흔들고 마음을 사로잡는 ‘첫’들이 있다. 예컨대 첫사랑, 첫 키스, 첫돌, 첫눈. 어떤 첫 만남은 평생 두고두고 입고 싶은 옷처럼 정겹고 편하다. 아무리 들어도 처음처럼 낯설고 어색한 말이 있는가 하면, 처음 들었을 때 귀에 착 달라붙는 말도 있다. 입버릇처럼 그 말을 반복하면, 어느 순간 그것은 입천장에 착 달라붙게 된다. 어떤 말이 비로소 내 말, 내 언어가 되는 근사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내게는 ‘시나브로’라는 말이 그랬다. TV를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아나운서가 처음 그 말을 내뱉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따라 하고 말았다. ‘시나브로’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정말 좋았다. 유치원생이 알기에는 어려운 말이었지만,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이 단어에 더욱 목을 매게 됐다. 목이 멜 때까지 외우다 보니 ‘시나브로’의 사전적 의미처럼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이 말에 길들여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낯선 말을 친근하게 전달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그런 고마운 사람을 통해 나는 내 사전을 점점 풍부하게 채워나갈 수 있었다. 그런 말은 불현듯 찾아와 나를 순식간에 잠식해버렸다. 마치 황무지에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그 별똥별이 피워내는 찬란한 불꽃처럼. 그리고 언젠가 이제니의 ‘창문 사람’을 읽을 때, 나는 또다시 입가가 간지러워지고 말았다.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말들이 입가를 툭툭 건드리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 하고 싶어졌다.

    ‘카렌다’나 ‘레코다’처럼 추적 가능한 말부터 ‘도케이’ ‘메이레이’처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말까지, 하나하나 또박또박 발음해보며 말에 대한 감을 익혀나갔다. 나도 모르게 ‘기어이 운율을 맞추고야 마는’ 데 동참하게 됐다. 그 말들은 ‘시나브로’ 내 혀끝에 수상돌기처럼 돋아났다. 만약 ‘캘린더’나 ‘리코더’였다면 나는 달력을 넘기듯, 무심코 음을 흘리듯 이 말들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당신을 보기 위해, 당신의 손길을 느끼기 위해 흔쾌히 ‘창문 사람’이 됐다. ‘창문 사람’이 돼 소중한 사람이 하는 말에 성심껏 귀 기울이게 됐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는 ‘커튼 사람’이, 꿈을 꿀 때는 ‘침대 사람’이, 만약 내일 아침에 비가 온다면 ‘우산 사람’이 될 것이다. 첫말을 대할 때처럼, 첫사랑에 온 마음을 줄 때처럼 모든 단어를 와락 끌어안을 수 있을 때까지. 다음에 찾아올 말, 다음에 찾아올 시를 기다린다. 옆에 있는 낯선 사람이 불쑥 건네는 상큼한 비타민 한 알을.

    이제니의 ‘창문 사람’
    시인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