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를 했거나 탈세 혐의로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이탈리아 유명인들. 1.국민여배우 오르넬라 무티. 2. 록 스타 바스코 로시. 3. 테너 파바로티. 4. 디자이너 스테파노 돌체(왼쪽)와 도미니코 가바나. 5. 오토바이 레이서 발렌티노 로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모이면 “탈세와 마피아만 뿌리 뽑으면 이탈리아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는 우스개가 아닌 뼈 있는 말이다. 이탈리아 사회에 만연한 탈세는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이탈리아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앙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탈세 규모는 무려 1200억 유로(약 181조200억 원)다. 최근 발표된 경제부 금융연구소 조사 결과는 더욱 놀랍다. 2008년 신고 기준으로 전체 납세자의 절반이 종합소득세를 1만5000유로(약 2265만 원) 미만으로 신고하고, 3분의 2가 2만 유로(약 3020만 원) 미만이라 했다. 1070만 명은 소득이 너무 낮아 과세 대상에서 면제됐다. 10만 유로(약 1억5100만 원) 이상 고소득자는 단 1%이며 3만5000유로(약 5285만 원) 이상 소득자도 13%에 그친다.
이탈리아에서는 집에 배선공이나 전기수리공을 불러 간단한 수리를 할 경우 영수증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영수증을 요구하면 부가가치세 20%를 더 내라고 하니 대부분 현금거래를 한다. 심지어 기업체 사장이 고용된 월급쟁이 근로자보다 소득 신고를 적게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시내에는 명품 승용차 페라리와 마세라티가 질주하고, 유명 휴양지에는 한 척에 수십만 유로 하는 호화 요트가 너무 많아서 휴가철이면 정박할 자리를 놓고 싸움이 벌어진다.
탈세자를 부러워하는 분위기
벌이가 시원치 않다고 징징거리면서 어떻게 이런 호화생활을 할 수 있을까? 바로 고소득자 대부분이 탈세를 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탈세자를 가리킬 때 약삭빠르고 꾀가 많다고 ‘푸르보(furbo)’란 형용사를 쓴다. 탈세자는 사회의 지탄을 받기보다 도리어 두뇌가 명석하고 본받을 인물로 대접받는다. 평범한 월급쟁이도 VIP의 탈세 보도를 보면서 ‘역시 머리를 잘 굴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약아질 수 있을까’라며 부러워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 멍청하다는 이탈리아인의 사고방식에 최근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이탈리아 국세청이 ‘탈세와의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신무기와 치밀한 작전을 도입했다. 인공위성은 물론 페이스북, 트위터 등 인기 소셜네트워크와 이베이 경매 사이트도 실소득을 측정하는 도구로 쓴다. 호화 사치품 1호로 꼽히는 요트를 샀다고 폼 잡고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 프로필에 올리거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 만한 호사를 누린 여행담을 자랑하면 자신도 모르게 국세청 감사 대상에 오른다. 인공위성으로 찍은 사진을 토대로 불법 건축이나 무허가 증축을 족집게처럼 잡아내는 것도 부동산세 징수에 큰 기여를 한다.
재경경찰은 로마에서 잘나가는 치과의사의 탈세 현장을 잡기 위해 부자(父子)로 가장한 수사원 2명을 환자로 위장시켜 수주간 치료를 받게 해 꼬리를 잡았다. 이 치과의사는 국세청에는 무일푼의 무소득자라 신고해 지금까지 1원도 종합소득세를 낸 적이 없는 완벽한 탈세자로 밝혀졌다. 재경경찰은 경제부 장관 직속의 특수 경찰로 현장에 출동해 세무감사를 벌이는 암행어사다.
완벽한 고소득층 탈세자들은 재산을 어디로 빼돌릴까? 중부지역 리미니(Rimini) 옆에 있는 산마리노(San Marino) 공화국은 모나코, 룩셈부르크, 스위스와 더불어 푸르보 족의 재산 해외 은닉처로 꼽힌다. 독립 공화국이지만 리미니에서 20분도 안 걸리는데다 국경조차 없는 조세 천국이기 때문이다. 국토면적이 61㎢의 산마리노는 인구가 3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국가지만 10여 개 은행이 수십여 개의 지점을 두고 있다. 금융업과 관광산업이 주 수입원이다.
하지만 산마리노 은행으로 재산을 빼돌리는 것도 이탈리아 정부의 탈세 강경책으로 더는 어려울 전망이다. ‘라 스탐파(La Stampa)’지에 따르면 이탈리아 중앙은행이 산마리노의 주 거래처인 리미니 시 은행들을 급습해 정밀 감사를 반복하자 산마리노에 유입되는 돈의 3%가 줄었고, 기존 예금도 60억 유로(약 9조600억 원)가 빠져나갔다. 산마리노 정부는 이탈리아 정부의 압력과 국제사회의 눈총에 시달리다 드디어 은행 투명성을 선언했다. 푸르보 족이 발길을 돌리자 8000만 유로의 재정적자로 국제통화기금(IMF) 지원 요청설까지 나돌고 있다.
지난해 여름 휴가철에는 리미니, 사르데냐 등 호화 휴양지에 정박한 고급 요트의 자금 출처와 타명의 등록을 조사하는 재경경찰의 새로운 작전이 이탈리아 부자들을 벌벌 떨게 했다. 재경경찰이 기업체, 상점, 레스토랑 등 어디에서나 그림자만 나타나도 피가 얼어붙는다는 표현을 흔히 쓸 정도다.
아르헨티나 축구감독 디에고 마라도나도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에 왔을 때 반갑지 않은 재경경찰의 방문을 받고 고가의 다이아몬드 귀고리를 압수당했다. 마라도나는 나폴리 팀에 소속해 있을 때 3000만 유로(약 453억 원)를 탈세한 혐의로 국세청의 추적을 받았지만 특유의 드리블로 요리조리 몸을 피했다. 10월 말에는 50회 생일을 맞아 이탈리아 프로축구팀에서 감독직을 맡고 싶다는 희망을 나타냈으나 탈세 문제로 꿈을 접었다.
조세 부담 놓고 복잡한 세법은 여전
탈세가 만연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조세 부담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간지 ‘일 메사제로(Il Messaggero)’는 세계은행 보고서를 인용해 “이탈리아 기업이 영업이익의 68.6%를 세금으로 낸다”고 보도했다. 유럽 평균 44.2%, 세계 평균 47.8%에 비해 그 부담이 엄청나다. 또 세무사도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세무법과 워낙 자주 바뀌는 규정 때문에 관련 서류 작성에 쏟는 업무시간이 연간 285시간에 달해 기업가들을 짜증나게 만들고 있다. 세금 내기가 너무 어려워 다른 유럽연합국보다 평균 60시간 이상을 허비하는 것이 기업 경쟁력 저하의 한 원인이다. 또 행정 처리에 드는 비용도 이탈리아 국내총생산(GDP)의 1%에 달한다. 상황이 이러니 까다로운 관련 법규에 지쳐 본의 아니게 탈세자가 되기도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과거와 달리 탈세자는 이제 닮고 싶은 아이콘이 아니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이탈리아인들도 “탈세자는 공동체 권익을 침해하고 조세 의무를 지키는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고 사고방식을 바꾸고 있다. 로마에서 전철을 타면 “무임승차는 바로 탈세자”라는 경고형 안내 방송을 들을 수 있다. 더 좋은 무상 공교육과 의료보험 혜택을 원하는 이탈리아인들은 탈세와의 전쟁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국세청도 세금 내기 편한 나라를 만들고자 대대적인 행정 간소화 시스템을 도입했다. 파격적인 패션의 돌체, 가바나가 어떤 패션으로 법정에 출두할지 가십이 뜨고 있다. 아무리 패션의 나라 이탈리아라도 탈세자 패션이 새 트렌드가 되면 큰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