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위원장이 최고 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발표하려 한 문건에는 ‘FTA 비준 원칙’과 ‘공천 제도 개혁’에 대한 소신이 담겨 있다.
이런 고민 때문일까. 남 위원장은 새해 예산안 처리 이후 지역구(경기 수원)에 머물며 민심 수습과 대등한 당청(黨靑) 관계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는 게 보좌관의 귀띔이다. 남 위원장의 ‘고심’이 길어지면서, 국내 언론은 “(상임위에서) 추가협정 부분만 논의할 것” “남 위원장이 기존 협정의 폐기를 공식 요청했다” 등의 상반된 보도를 쏟아냈다.
남 위원장은 고심 끝에 12월 15일 예정된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FTA 비준 처리건과 정국에 관한 소신을 공식 발표하려 했지만 회의 자체가 취소되면서 자신의 뜻을 밝힐 기회를 잃었다. ‘주간동아’는 12월 10일, 15일 전화·서면 인터뷰와 최고·중진 연석회의 연설 자료(제목은 ‘연석회의 말씀자료’)를 입수해 그의 FTA 비준 원칙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 위원장은 한미 FTA 재협상 과정에 대해 “당과 국회의 뜻은 안중에도 없고, 정부의 일방적인 입장만 있다”고 비판한 뒤 “FTA 비준 절차와 내용에서 국민에게 당당한 모습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며 ‘FTA 비준 3원칙’을 처음 제시했다.
첫째는 민주적 절차 속에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가는 데 초점을 둔다는 것. 진통을 겪더라도 여야 간 합의를 통해 비준을 이끌어내겠다고 강조하면서 여야가 각자 주장만 되풀이하다가 초유의 폭력 상황으로 치달은 2년 전의 전철을 되밟지 않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기존 협정문은 철회, 통합해서 심의
“무조건 정부를 감싸지도 않을 것이고, 억지 주장으로 정치 공세를 펴는 것도 강하게 제지할 것이다. 협상안 내용을 면밀히 검토할 것이다.”
또 “한미 FTA 비준을 원칙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2012년 4월) 총선을 코앞에 두고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말에서는 FTA 비준에 대한 그의 고심을 읽을 수 있었다.
기존 협정문과 재협상 합의 내용을 담은 추가합의서의 비준 방식에 대해선 “추가협상안만 놓고 국회가 검토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기존 협정문을 철회하고, 추가협상안을 포함해 전체를 놓고 통합 심의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원칙”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이는 국회 본회의에 상정 대기 중인 기존 비준안을 폐기하지 않고, 재협상 결과에 대한 새 비준안을 별도 작성해 2개의 비준안을 국회에 올리겠다는 정부 입장에 배치된다.
“전체 산업을 놓고 이익 균형과 파장을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다. 정부도 추가협상 결과가 대폭 양보라는 대내외의 비판에 대해 국익 전체를 놓고 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만큼, FTA 협상안 전체를 놓고 국익을 기준으로 검토해나갈 것이다.”
남 위원장은 서로 다른 내용의 협정문 2개를 국회가 각기 비준하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분리 처리를 할 경우 배기량 3000cc 이하 한국산 자동차 관세를 즉시 철폐하는 내용의 기존 협정안을 처리하고, 곧바로 4년 뒤 관세를 일괄 철폐하는 재협상안을 처리하게 돼 모순이라는 것.
국회 비준 시기에 대해서는 “세 번째 원칙”이라며 “재협상의 물꼬가 트인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열었다.
“미국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재협상까지 벌어진 상황을 감안했을 때, 이번에는 빠졌지만 쇠고기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재협상 요구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 추가협상 과정에서 미국 측이 이를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의문이다. 만약 미국이 쇠고기 재협상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면 이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할 것이다. 미국 측 비준 과정을 지켜보며 비준 절차를 밟아도 늦지 않다.”
미국 백악관 당국자가 최근 “한미 양국은 쇠고기 문제에 대해 대화를 계속할 것”이라고 했고, 맥스 보커스 미국 상원 재무위원장이 쇠고기 시장 개방에 진전이 없을 경우 FTA 의회 비준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진 마당에 우리가 비준하고 미국이 비준하지 않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다.
협상 과정에서 나타난 절차상 문제에 대해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12월 7일 국회 외통위 현안 보고 자리에서 ‘재협상은 없다’고 했다가 추가협상을 진행한 것에 대해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으로부터 사과는 받았지만, 협상 진행 과정에 대해선 전혀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서명한 조약을 미국이 국내 사정을 이유로 수정하자고 했으면서 오히려 협상 주도권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비친 데 대해 국민이 의아해한다. 고위 통상관료의 제한된 정보와 판단력으로 국가 간 중대 결정을 내렸는데, 이 과정에서 국회와 국민여론이 무시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결국 이렇게 벌여놓은 정부안을 국회가 비준 일정과 절차에 쫓기면서 뒤처리하듯이 처리해야 하는 상황은 삼권분립의 헌법 기본정신과도 맞지 않는다. 통상절차법을 제정해서라도 반드시 이 문제를 바로잡겠다.”
‘통상절차법’이라도 만들어 정부 견제
통상절차법 제정안은 18대 개원 이후 민주당 김종률 전 의원 등 5명이 발의했다. 통상 협상 과정의 국회보고 의무화, 여론수렴 절차 마련 등이 핵심 내용. 하지만 정부가 “헌법상 대통령 조약 체결권을 침해하고 협상 전략을 노출시킨다”는 등을 이유로 반대하면서 소관 상임위인 외통위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남 위원장이 지역구에서 자숙하며 3원칙을 세우고 정부 태도를 문제 삼은 것은 현재의 정국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평소 ‘예결특위 상설화’와 ‘공천제도 개혁’을 강조한 그가 “예산안 강행처리 후 민심 수습과 근본 대책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며 꺼낸 대책 역시 이 두 가지였다.
“예결특위가 상설화되면 정부가 예산을 수립할 단계부터 들여다볼 수 있고, 설사 강행처리를 하더라도 이미 한 번 걸러진 만큼 ‘형님 예산’ ‘쪽지 예산’이라는 불명예를 쓰지 않을 것이다. 여든 야든 예산안 강행처리를 하면 몸을 던져 실세 공천권자의 ‘공천 눈도장’을 받는 식으로 해서는 국회 선진화가 요원하다. (한나라당) 나경원 공천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이 공청회도 열고 의견을 수렴해 좋은 제도 개선안을 만들고 있지만 당 지도부의 관심과 의지가 매우 부족하다.”
예산안 강행처리 이후 곧바로 FTA 비준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넘겨받은 남 위원장. 원칙과 합의를 강조한 그의 3원칙이 FTA 비준 처리에 어떻게 투영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동시에 그가 강조해온 ‘대등한 당청 관계’를 FTA 비준 과정에서 어떻게 실현할지도 관전 포인트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