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중 만난 서울 강남에 있는 한 미혼 여성 전문 산부인과 원장은 이렇게 귀띔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여성에게 “결혼 전 성관계를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고루할지도 모른다.
실제 ‘주간동아’가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홈페이지(www.duo.co.kr)를 통해 10월 29일~11월 2일 미혼 여성 31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무려 82.6%(261명)가 “결혼 전 성관계를 할 수 있다”고 답했다. 53.5%(169명)는 “결혼과 섹스는 전혀 무관하다”고 대답했고, 특히 21.2%(67명)는 “마음만 맞으면 처음 만날 날 섹스도 가능하다”고 했다.
성관계를 하는 이유로는 “애정의 표현이니까”가 75.9%(240명)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처음 성관계를 한 시기를 묻는 질문에는 “20대 초반 대학생 때”가 41.5%(131명)로 가장 높았고, “20대 중후반 사회 초년생 때”가 35.4%로 뒤를 이었다. “아직 성관계를 한 적이 없다”는 대답은 10.8%(34명)에 그쳤다.
오랫동안 음지에 있었던 한국 여성의 성은 2010년 현재 ‘섹스 앤 더 시티’의 본고장인 미국 뉴욕 수준으로 개방됐다. 방송과 영화, 인터넷 등 대중매체에서는 섹스를 남녀가 서로를 알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의 하나로 그리고 있다. 연예인뿐 아니라 일반 여성들도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성 경험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한다. 해성산부인과 박혜성 원장은 “여성들이 경제력을 가지면서 성에 대해 당당해지고 즐기기 시작했다”며 “혼전 순결을 말하는 여성도, 이를 바라는 남성도 급속도로 줄었다. 실례로 1990년대만 해도 처녀막 재생수술을 받는 환자가 꽤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없다”고 했다.
사라진 처녀막 재생술
올해로 4회째 맞는 ‘핑크영화제’(사진)는 여성이 주체가 돼 자신의 성적 쾌락에 대해 질문한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일본의 핑크영화(1960~70년대 일정 분량의 베드신만 포함시키면 감독의 자유로운 창작을 보장했던 장르로 지금까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를 소개하는 2010핑크영화제는 11월 5일부터 14일까지 씨너스 이수(서울)와 이채(경기도 파주)에서 열린다(www.pinkfilm.co.kr). 영화제 홍보를 맡은 씨너스앳나인 안종선 대리는 “작은 규모로 시작한 영화제가 매해 인기를 더하고 있다. 매진되는 영화도 많고, 올해 역시 관객의 기대가 높다. 특히 여성의 성적 판타지에 충실한 소프트 섹슈얼 작품들이 인기”라며 “여성들이 당당히 영화를 보러 오는 건 물론, 남자친구나 남편과 오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고 밝혔다.
9월 26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성의학학회 14회 대회에서도 여성 성기능 향상에 대한 연구가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이 대회는 발기부전, 조루 등 남성의 성기능 장애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해왔다. 조직위원장을 맡은 고려대 안암병원 비뇨기과 김제종 교수는 “이번 대회에서는 우울증과 여성 성기능 장애의 상관관계, 출산과 성기능의 연관성, 성적 자극에 대한 뇌 흥분 부위의 남녀차 등 여성에 대한 연구가 특히 많아졌다”며 “남성의 비아그라처럼 여성의 성기능 향상을 돕는 획기적인 치료제 개발도 조만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대목동병원 비뇨기과 윤하나 교수팀은 성적 자극에 대한 성인 남녀의 뇌 반응을 기능적 뇌 자기공명영상장치(fMRI) 촬영으로 살펴본 결과를 발표했는데, 여성은 이야기 구조를 지닌 비교적 노출이 적은 에로틱 영상에, 남성은 노출이 심하면서 노골적 성행위를 보여주는 영상에 대뇌 피질이 활발히 반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윤 교수팀은 “남녀가 각각 호응하는 성적 자극이 다르다는 통념이 다시 한 번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남녀의 성적(性的) 차이를 고려해 여성의 성기능 장애를 치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여성의 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녀 모두 긍정적으로 바뀌고, 성의식이 뉴욕 수준으로 개방됐으며,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는데도 아이러니한 건 우리나라 여성의 성 만족도는 여전히 아시아 최하라는 사실이다. 2009년 2월 글로벌 제약회사 화이자가 발표한 ‘아시아퍼시픽 13개국 성인 남녀의 성 만족도 설문조사’ 결과, 한국인의 성 만족도는 최하위권인 12위를 기록했고, 특히 여성은 “자신의 성생활에 만족한다”고 답한 응답이 11%에 불과했다(남성은 19%). 2006년 조사에서도 한국 여성은 7%만이 “자신의 성생활에 매우 만족한다”고 답했다. 이런 불일치가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대한여성오르가슴찾기운동본부 ‘팍시러브’(www.foxylove.net) 운영자인 이연희(34) 씨는 “여성의 성 개방이 ‘침실’ 속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며 “남자는 여전히 자신이 주도적으로 섹스를 하기 원하고, 여자는 오르가슴 연기를 하며 남자에게 따라준다”고 강조했다. 여자들이 섹스를 할 때 남자의 즐거움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면서 이를 여자의 강력한 ‘무기’로 삼는 반면, 정작 본인의 만족을 추구하는 데는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관대해졌다고 해도 ‘밝힌다’는 이미지는 여전히 치명적이다. 안종선 대리도 “핑크영화제의 섹슈얼한 작품을 여자끼리 볼 때와 남편이나 남자친구와 볼 때 여자들의 반응이 전혀 다르다. 남자와 함께 있을 때 여자는 자연스레 ‘몸을 사리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도 여성의 성 만족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20대 미혼 여성은 피임을 열심히 해도 여전히 임신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결혼 후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는 성욕 자체가 급속도로 떨어지면서, 여전히 ‘왕성한’ 남편과 갈등을 겪는 일도 허다하다. ‘여성, 섹슈얼리티, 국가’(책세상 펴냄)의 저자 한양대 이성숙 교수(여성사 강의)는 “최근 정부의 출산장려책도 특히 여성에게 ‘출산’에 대한 책임을 지움으로써 성 만족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1 여성의 성감은 상대방과의 친밀감 및 애정, 그날의 몸 상태와 분위기 등 외부적 요인에 큰 영향을 받는다. 2 9월 26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성의학학회 14회 대회에선 여성 성기능 향상에 대한 연구 발표가 많이 이뤄졌다.
박혜성 원장은 “여자의 성 만족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섹스리스 부부로 갈 확률이 높다”면서 “서양은 부부가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이별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성관계 없이도 오누이처럼 살든가, 아니면 쌍방, 특히 남자가 성적 외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모두 제대로 된 부부 형태라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성과학연구소 이윤수 소장(비뇨기과 전문의)도 “여자는 남자와 달리 성관계를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다. 따라서 그냥 주부이자 엄마로 살다가 다른 사람에게서 오르가슴과 같은 성적 기쁨에 대해 들으면 자신의 성생활에 불만을 토로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핑크 비아그라 등 여성의 성기능 향상을 위한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고는 하나, 아직 확실한 치료법이 나온 것은 아니다. 여성용인 핑크 비아그라는 현재 발매 허가를 받지 못했다. 비아그라는 남성의 페니스로 가는 혈액 양을 늘려 발기하게 한다. 여성용 역시 음핵과 질로 가는 혈액 양을 늘려 성감을 높여준다는 원리지만, 이 약이 확실히 여성의 성감을 높여주고 성기능을 향상해줬다는 객관적인 결과를 얻는 데 실패했다. 여성의 경우 성기에 대한 자극뿐 아니라 친밀감, 애정, 분위기, 그날의 몸 상태 등 외부적 요인이 성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열린 것 같으나, 아직 제대로 열리지 않은 게 여자다. 또 단순한 남자와 달리 100인 100색 다른 모습을 지닌 복잡한 존재이기도 하다. 쉿! 남자는 모르는 2010년 한국 여성들의 속사정 속으로 들어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