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남들의 수다
기자가 알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언젠가 그를 두고 동료들과 갑론을박을 펼친 적이 있다. 이 상황을 ‘바람’으로 봐야 하나, 아니냐가 논란의 주제였다. 그런데 유부남 동료들은 “바람이 아니다”라고 한목소리로 강조했다. 육체적 관계도 없고, 심지어 ‘작업’을 건 것도 아닌데 왜 바람이냐는 것. 반면 여성이자 당시 미혼이었던 기자는 “당연히 바람, 그것도 심각한 바람”이라고 주장했다. 마음의 흔들림 자체가 ‘바람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봤기 때문(결혼 이후 생각이 조금 달라졌지만).
연애·섹스에 대한 솔직한 뒷담화
연극 ‘훈남들의 수다’의 36세 유부남 성환 역시 ‘단 한 번도 바람을 피운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재즈바에서 처음 본 여자와 와인, 음악, 그리고 갓 캐낸 버섯 향 같은 체취에 취해 ‘원나이트 스탠드’를 한 적은 있지만 이는 찰나의 사랑, 행복한 기억이지 바람은 아니라는 것. 성환도 다정한 남편이자 좋은 아빠다.
가슴골이 보일 듯 말 듯 파인 옷을 입고, 몸을 숙일 때 손으로 가슴을 살짝 누르는 여자를 보면 마음이 저릿해온다고 성환은 털어놓는다. 짧은 치마를 입고 계단 오르면서 가방으로 치마 밑을 살짝 가린 ‘보통은 어린’ 여자들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조금은 통통하고 똥배도 살짝 나와야 만지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바로 아내다. 그럼에도 마음과 몸이 살짝살짝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남자의 본능이다.
서울 대학로 나온씨어터에서 8월 22일까지 상연되는 ‘훈남들의 수다’는 성환, 태기, 경준, 희수 등 30대 초·중반의 남자 4명이 와인바에 모여 연애, 결혼, 섹스, 바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정이다. 홈쇼핑 쇼호스트인 34세 태기는 아내와 잠자리를 전혀 하지 않는 섹스리스 부부다. 치과의사인 34세 경준은 이혼 후 전처와 더욱 가까워진 자유로운 영혼. 싱글인 32세 희수는 항상 ‘걸’들을 위한 ‘센서’를 켜놓는 플레이보이다.
“저, 여기 처음인데요.”
희수는 와인 한 잔을 시켜도, 그냥 마시는 법이 없다. 처음 찾은 와인바 여주인에게 “어떤 와인이 좋은지” “어떻게 마셔야 맛있는지” 등을 하나하나 물어본다. “여기 단골이 될 것”이라는 멘트를 날려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관심과 칭찬을 싫어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희수의 지론. 몰래 사진을 찍은 후에도 이를 보고 당황해하는 여자에게 “프레임 속 당신은 실물과 또 다른 매력이 있어서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싫다면 지우겠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지우라”고 단호히 말하는 여자는 없다.
언제, 어디서나 유쾌한 입담으로 분위기를 살리는 태기는 자신이 유부남인 사실을 숨기고, 여자들에게 작업도 자주 걸지만, 아내만은 정숙한 여자이길 바란다. 물론 스스로도 ‘일정 선’을 넘어서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런데 태기는 몇 년째 아내와 섹스를 하지 않는다. “밤에 안 서고, 그러니 아내를 안을 수 없다”는 것. 연봉 1억 원을 받는 잘나가는 ‘쇼호스트’지만, 방송 때마다 매출에 대한 강한 압박을 받는다. 엄청난 스트레스가 결국 발기부전으로 이어진 것. 도덕 교사 같은 아내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의논할 수 없었다는 그는 잠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반면 경준은 이혼을 “결혼의 마지막 프로세스”라고 말한다. 즉 연애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이혼한다는 것. 물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은 용기가 없어서일 뿐, 대다수 부부는 이혼을 꿈꾼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혼 후 말이 훨씬 많아졌고(외로워서?) 이성에게 작업을 거는 일도 확 줄었다.
이 연극은 4명의 남자가 조금도 쉬지 않고 주야장천 말을 이어간다. 한 남성 관객이 “저런 녀석들 꼭 있어”라고 말했듯, ‘불알’ 친구들 모임에 살그머니 끼어든 것처럼 일상적이고 자연스럽다. 배우들 외모 역시 보통 수준이다(엄청난 훈남을 기대했으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제목은 ‘훈남들의 수다’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수컷들의 찌질한 수다’가 더 어울려 보인다.
깐깐한 미혼녀 ‘은밀한 사생활’
B사감은 러브레터를 읽지 않는다
33세 학원 강사 수현은 당당하고 일 잘하는 현대판 B사감이다. 깐깐한 노처녀 주임 강사로 악명을 떨치는 그지만, 오랜 남자친구 진수에게는 애교 많고 다정다감하다. 그런데 학원에 잘생기고 멋진 영어 강사 재원이 들어오자 수현은 재원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쓴다. 특히 재원이 젊고 예쁜 수학 강사 태희에게 친절을 베풀면, 더욱 과민하게 반응한다.
어느 날 재원이 체기가 있는 수현의 손을 잡고 마사지를 해준다. 수현은 “괜찮다”고 단호히 뿌리치지만 그날 밤 “어머, 제 손이 얼굴만큼 곱다고요? 그런 말 자주 들어요. 호호”라며 즐거워한다. 또 재원이 작은 선물을 건네자 수현은 “사람 참 쉽게 보네요”라며 화를 내고는 집에 돌아와 “재원의 마음을 훔쳤다”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몰래 재원의 재킷을 들고 그의 냄새를 맡고, 태희의 화장품을 꺼내 바르며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특히 태희가 재원에게 관심을 보이자, 속마음과 다르게 재원을 험담한다.
그러던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과음한 수현을 집으로 데려다주던 학원 동료들은 그녀의 남자친구 진수가 상상으로 만들어진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학 시절 친구의 애인이자 짝사랑하던 선배 진수가 수현을 태우고 가다 오토바이 사고로 죽자, 죄책감과 후회로 죽은 진수의 허상을 붙잡고 살았던 것.
“(재원이) ‘밥 먹었느냐’고 물어봐주고, 실없는 농담 걸어주고, 손 잡아주는 게 싫지 않았어. 그냥 친절이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가슴 설레고 좋았어. 내가 굉장히 예뻐진 듯한 느낌이었어.”
사랑하고 사랑받고 ‘예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짝사랑하는 남자를, 그렇기에 더 많이 험담한다. 이별 후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 같다’는 절망에 빠진다. 이처럼 차기도 해보고, 차여도 보고, 짝사랑도 해보고, 짝사랑도 당해본 평범한 여성이라면 수현의 기대, 상상, 질투, 사랑, 아픔, 그리고 이 모든 걸 극복하는 과정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 터. 연극 ‘B사감은 러브레터를 읽지 않는다’의 포인트는 바로 ‘공감대’에 있다.
두 연극 모두 특별하지 않은 남녀의 평범한 일상과 그 속에 담긴 속마음을 그린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여성의 환한 웃음처럼, 격렬한 섹스 후 숙면에 취할 때 느껴지는 행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