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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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능에 하나의 정자각… 천연박물관 광릉숲 거느려

세조와 정희왕후 광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05-17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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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능에 하나의 정자각… 천연박물관 광릉숲 거느려

    광릉은 조선 최초의 동원이강형 능침이다.

    광릉(光陵)은 조선 제7대 왕인 세조(世祖, 1417~1468)와 그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같은 용맥에 언덕을 달리해 왕과 왕비를 각각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에 정자각을 세우는 동원이강(同原異岡) 형태로 만든 최초의 능이다. 왼쪽이 세조, 오른쪽이 정희왕후의 능침이다. 광릉은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골이 깊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2번지에 있다. 이곳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릉수목원이다.

    1455년 윤6월 11일 단종은 “내가 어려서 즉위해 안평대군이 반란을 꾀하고 수양대군이 평정했으나 그 일당이 남아 있어 궤도를 벗어나는 일이 염려돼 수양대군을 종실의 장으로 모시고 국사를 임시 서리(署理)해달라”고 주문했다. 수양대군은 사정전으로 들어가 단종을 알현한 뒤, 면복을 갖추고 근정전에서 즉위했다.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차남으로 조카 단종의 왕권을 빼앗아 13년 3개월을 재위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태종 때 실시한 호패법을 복원해 백성의 동향을 파악하고,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찬술하기 시작했다. 전현직 관리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리에게만 주는 직전법을 실시해 국가의 재정수입을 증대하고,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 출신이 아닌 중앙의 문신 위주로 발령을 냈다. 이 때문에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세조는 지방 반란을 모두 평정하고,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중앙집권 체제를 다져나갔다. 또 백성의 생활 안정책으로 누에 농업에 관한 ‘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펴내 보급했다.

    어린 조카 왕권 찬탈 죄책감에 시달려

    그러나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권을 찬탈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고, 특히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게 시달렸다.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침을 뱉어 피부병에 걸렸는데 이를 고치려고 강원도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가 고쳐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신적으로 시달리던 세조는 큰아들 의경세자(덕종)가 20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고,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파내는 패륜을 범했다. 그러나 그의 둘째 아들 예종 역시 20세도 안 돼 생을 마감했다.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정희왕후는 계유정난(癸酉靖亂) 당시 왕권 찬탈의 정보가 새나가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결행을 촉구할 만큼 대담한 여장부였다. 1468년 아들 예종이 19세에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나 예종이 재위 13개월 만에 요절해 곧바로 장자(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어린 왕을 대신해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다.

    1468년 7월 26일 임금(세조)이 병이 나자 세자(예종)가 사슴을 잡아 올리고, 병환이 심해져 수릉(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놓는 임금의 능)을 마련하려 하나 신하가 반대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세조는 병세가 악화되자 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9월 7일 예종이 즉위한 다음 날 세조는 수강궁 정침에서 향년 52세로 승하했다.

    신숙주, 한명회, 서거정, 임원준 등이 상지관을 거느리고 세종의 능인 영릉 주변, 죽산, 양지, 신촌 연희궁터 뒷산 등에 가서 능터를 살폈으나 마땅치 않았는데 광주 정흠지 묘역의 산 모양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주혈만 단정히 하면 능침으로 좋다고 판단했다. 이곳으로 결정하고 선친 일가의 무덤을 이장하는 정창손과 유균, 영의정 김질 등에게 인력과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능침에서 보이는 사가의 무덤과 민가 등을 이전하는 대역사인 것이다. ‘춘관통고’(1788년 오례의 연혁과 실행 사례를 편찬한 책)에 따르면 반경 90리에 이른다 하니 실로 엄청난 면적이다. 이것이 지금의 광릉 숲이 됐다.

    두 능에 하나의 정자각… 천연박물관 광릉숲 거느려

    ① 세조의 유언대로 난간석과 회격실로 간소하게 조성된 능침.② 광릉의 무인석. ③ 광릉의 호석은 얼굴 부분이 단순하고 추상적으로 조각돼 있다. ④ 조선 초기에는 병풍석에 있던 십이지신상이 난간석, 동자석에 조각돼 12방위를 가리키고 있다.

    세조는 생전에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마련하지 마라. 석실은 유명무실하다”고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예종은 “대행대왕(세조)께서 석실을 만들지 못하도록 명했으니, 이제 유명을 준봉해 아름다운 덕을 이루게 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석실을 쓰지 않고 검소하게 회격실로 하여 산릉도감의 동원인력도 6000여 명에서 3000명으로 줄였다.

    예종은 대왕이 나라를 다시 일으켰으니 묘호를 세조(世祖)로 올리고, 시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의숙인효(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懿肅仁孝)’로, 능호는 광릉(光陵), 혼전(魂殿·왕이나 왕비의 국장 뒤 종묘에 배위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던 사당)은 영창(永昌)으로 했다. 일반적으로 왕의 장례는 승하 후 5개월 안에 치르나 세조의 산운(山運)이 해를 넘기면 좋지 않다 하여 80여 일 만인 11월 28일에 하현궁(下玄宮·임금의 관을 무덤에 내려놓던 일)을 했다.

    능침의 좌향(坐向·묏자리나 집터 따위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은 정북에서 정남하는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하고, 장명등 창호로 앞을 바라보면 주엽산 봉우리에 축을 맞추었다. 예종이 세조의 묘호나 능호 명칭, 산 자리 잡기, 장례일 등 매사에 무척 신중했음을 알 수 있다.

    풍수가들은 광릉을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 자리가 좋아서 이후 400여 년간 세조의 후손이 조선을 통치했다고 한다.

    두 마리 용이 여의주 가지고 노는 ‘쌍룡농주형’

    세조가 승하한 지 14년 후, 치료 차 온양에 갔던 대왕대비(정희왕후)가 온천욕 후 음식을 드시지 못한다는 전갈이 온 다음 날 대책을 논하는 중에 3월 30일 저녁 대행대비(임금이나 비가 돌아간 뒤 시호를 올리기 전의 존칭)가 승하했다. 이때 정희왕후의 후손 능인 경릉(첫째 아들), 창릉(둘째 아들), 공릉(둘째의 정비), 순릉(손자 성종의 정비)의 제향을 중지하고 풍악과 꽃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억불숭유 정책을 펼친 조선국이었으나 정희왕후는 계유정난, 사육신 사건 등의 정치적 아픔을 불교의 힘으로 달래고자 능침사찰인 봉선사를 중건하고 말년을 보냈다. 성종이 할머니 정희왕후의 죽음을 슬퍼해 식사를 소홀히 하자 신하들이 “3일이면 죽을 먹고, 죽은 이 때문에 산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三日食粥不以死傷生)”며 죽을 올렸다.

    두 능에 하나의 정자각… 천연박물관 광릉숲 거느려

    ⑤ 광릉의 능침사찰인 봉선사에 핀 연꽃. 봉선사는 음양 사상을 바탕으로 만든 사찰이다. ⑥ 광릉의 광활한 숲은 수백 년을 이어오고 있다. ⑦ 능침에서 바라본 정자각과 비각.

    서거정 등이 광릉의 동쪽을 다녀와서 주혈이 축좌미향(丑坐未向·북북동을 등지고 남남서를 바라보는 방향)하고, 주산의 청룡과 혈 아래 좌우측에 흙을 쌓으면 좋다 하여 이곳으로 결정하고 세조의 능침과 같이 난간석으로 했다. 그러나 세조 능침의 사초(무덤에 입히는 떼)가 쉽게 무너지는 원인이 삼물(석회, 가는 모래, 황토)을 너무 견고하게 쌓아 잔디와 흙이 엉키지 못해 뿌리가 깊이 뻗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여 산릉도감에서 정희왕후의 능침은 삼물 중 석회의 배합비를 적게 한 것으로 보인다.

    풀 한 포기 채취도 금할 만큼 잘 보존

    능호는 광릉으로 같이 쓰고 시호는 ‘크게 성취할 수 있었다는 정(貞)이요, 공이 있어 사람을 편하게 했다는 희(熹)’라고 했다. 시호를 정희로 올리며 ‘우러러 바라건대 밝은 영께서 많은 복을 내리시어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오이가 열리듯 번성하게 하시고, 그윽이 그 계책을 도와 종묘사직이 뽕나무 뿌리로 동여맨 것처럼 튼튼하게 하소서’ 했다.

    정자각은 길흉을 서로 저촉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므로 3년까지 세조는 구정자각(길례의 건물)에서 모시고, 왕비는 가정자각(흉례의 건물)을 지어 모시다 3년 후 가운데에 새 정자각(길례)을 지어 함께 모시기로 했다. 이것이 동원이강형의 시초가 됐다.

    광릉은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을 난간의 동자석으로 옮겨 새겼고 이것은 이후 왕릉 조성의 모범이 됐다. 광릉의 능역은 나무를 심고 잘 가꾸라는 세조의 명에 따라 조선시대 내내 풀 한 포기도 베지 않을 만큼 잘 보호해 지금 동식물의 낙원이자 천연의 자연박물관 구실을 한다.

    능침에서 바라보이는 숲은 수도권 최대 자연자원의 보고다. 광릉과 광릉수목원을 합하면 1300ha의 광활한 면적이다. 이곳에는 800여 종의 식물이 자생하며 아름드리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 침엽수와 활엽수가 많고, 천연기념물 제197호로 지정된 크낙새가 서식한다.

    광릉의 능침사찰은 봉선사로 능역 입구에 있다. 광릉의 참배로 입구에는 방지반원형의 연지(연못)가 있다. 이는 천원지방설(天圓地方設)에 따른 방지원도의 연지 조영기법으로 보인다.

    세조는 정희왕후와 근빈 박씨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제9대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로 추존된 덕종이며, 차남이 제8대 예종이다. 덕종의 능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에 있는 경릉(敬陵)이며, 예종의 능은 서오릉의 북동측 능선에 있는 창릉(昌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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