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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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학협회가 모태… 대한민국 최강의 이익단체

1967년에 역사 고증 ‘의사연구회’ 발굴 … 의협사 39년 앞당겨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10-05-17 1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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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학협회가 모태… 대한민국 최강의 이익단체

    의협 역대 회장단. 김익남은 ‘의사연구회’, 박계양과 이갑수는 ‘조선의사협회’ 회장. 오늘날 의협의 모습을 갖춘 ‘조선의학협회’는 심호섭이 초대 회장이다.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협회의 뿌리를 의사연구회에서 찾는다. 의사연구회는 1908년 11월 6일 한성 안팎의 의사 10여 명이 모여 발족을 논의한 뒤 11월 15일 김익남 육군 군의장을 회장, 안상호 의학교 교관을 부회장, 유병필(의학교 졸업생)을 총무로 선출하는 창립총회를 열어 공식 출범했다. 당시는 일제의 침략정책이 본격화하면서 대한제국의 명운이 풍전등화에 놓인 시기. 의료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한의원장에 일본 군의관 출신 사토 스스무가 취임하면서 일본인이 병원 운영권을 독차지했고, 일본인 의사들이 계림의학회를 조직했다. 현대의학을 공부한 한국인 의사는 총 66명(일본인 283명, 미국인 19명)이던 시절이다.

    의사연구회는 1909년 4월 임원회의 결의로 의사법 제정반포를 정부에 건의하는 등 여러 활동을 벌였지만, 한일강제합방 이후 1910년 8월 22일 해산했다. 김 회장은 1911년 북만주로 망명, 42년 11월 서울로 돌아와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한일강제합방 이후 일본인 의사들은 조선의학회와 경성의사회를 결성했으며, 한국인 의사들은 1915년 한성의사회(최초의 지방의사회)와 1930년 조선의사협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일제는 1939년 가을 이용설 전 세브란스의전 교수가 한국 대표 자격으로 태평양외과학회에 다녀온 사실을 구실 삼아 해산을 요구, 결국 창립 9년 만에 조선의사협회는 해체했다(‘의협 100주년사’ 가제본에서). 이어 한성의사회도 경성의사회에 통합됐다.

    광복 이후 현대사가 그랬던 것처럼 의사단체의 행로도 평탄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17일 서울시내 400여 명의 개원의가 모여 건국의사회를 창립했다. 이들은 미 군정청의 보건사업에 협조했고, 의대 교수들은 9월 19일 조선의학연구회를 따로 만들어 학술강연회 등을 열었다. 그러다가 1947년 5월 10일 두 단체를 아우르는 조선의학협회가 창립되면서 오늘날 대한의사협회처럼 중앙 의사단체로서 제 모습을 갖췄다.

    길면 9년, 짧으면 35일 … 의협 회장 임기도 다양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조선의학협회는 이름을 대한의학협회로 바꾸고 휘장 제정과 협회지 창간에 나섰다. 또한 ‘간염퇴치 캠페인’ ‘식중독 예방 캠페인’ ‘금연 운동’ ‘태아 성감별 방지 캠페인’을 펼치며 국민의 머릿속에 각인됐다. 1995년 오늘날의 대한의사협회로 이름을 바꿨는데, 당시 새 명칭으로 대한의사회가 유력했으나 약칭으로 사용되던 ‘의협’을 고려해 현재 이름으로 결정됐다.

    여기서 잠시 의협 창립기념일에 대해 알아보자. 1967년까지 의협은 개원의와 의대 교수를 아우른 조선의학협회 창립일인 5월 10일을 기념했다. 그러나 1967년 의사학자 김두종, 사학자 신석호의 고증으로 창립연도 재검토에 들어가, 1908년 한국 의사들이 주축을 이룬 의사연구회가 활동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오늘날 창립기념일이 11월 15일로 정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의학협회가 모태… 대한민국 최강의 이익단체

    1995년 6월 17일 대한의사협회 현판식. 왼쪽부터 김재전 의협 명예회장, 권이혁 학술원회장, 한격부 명예회장, 이문호 대한의학회 명예회장, 유성희 의협 회장, 천희두 대의원회 의장, 이주걸 고문, 임종호 광주광역시의사 회장.(직함은 당시 기준)

    의협 102년 역사에서 의협을 이끈 역대 회장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조선의학협회 때는 2·3·7대(윤일선)를 제외하고 1~10대 7년간 심호섭 회장이 장기 재임했다. 심 회장은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경의전과 세브란스의전 교수, 서울의과대학장을 역임했는데, 6·25전쟁 당시에는 피난지에서 열린 총회에서 재신임을 받았다.

    현재의 직제와 달리 광복 이후에는 실무를 맡은 회장 외에 이사장이 따로 있었지만, 1961년 군사정변 이후 정관을 개정하면서 회장은 실권을 잃었다. 1년이던 임원 임기도 2년으로 늘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회장과 이사장의 이원적 구조는 불화를 일으켰고, 결국 1966년 17대 박주병 회장이 이사장과의 불화로 사표를 내자 정관 개정 움직임이 일었으며, 결국 회장 중심제로 바뀌었다. 이사장 중심체제는 4년 4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회장 임기가 3년제로 정착된 것은 1974년 대의원총회가 집행부의 임기 연장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부터다. 최초로 3선에 성공하며 24~26대(1979~88년)를 맡은 문태준 회장이 있었는가 하면, 12대 윤치왕 회장(1960년 10월 8일∼11월 13일)은 취임 35일 만에 사퇴했다. 당시 관훈동 의협회관이 화재로 소실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명예직으로 총회석상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되던 의협 회장은 2001년 의약분업투쟁을 거치면서 의료계 조직 개선책으로 직선제로 바뀌었다. 2001년 10월 19일 김재정 회장이 사퇴한 가운데 치러진 우편 직접선거에서는 의권쟁취투쟁위원회 위원장 출신인 신상진 후보가 첫 직선제 회장(32대)에 당선돼 김 전 회장의 잔여 임기 1년 6개월을 이끌었다. 이 시기 대규모 ‘의사 파업’을 거치면서 회원 사이에는 여론 형성과 정책 집행에 강한 영향력을 보여주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결국 11월 18일 전국 의사대표자대회에서 ‘의협의 정치 세력화’를 주창했다. 2002년 말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신 회장 체제는 대외협력위원회(2002년 3월 27일)를 출범해 정치권과 언론, 시민단체와 유대를 강화했으며 대통령 후보자의 대선 공약에 의료계 현안이 반영되도록 했다.

    33대 김재정 회장에 이어 당선된 34대 장동익 회장은 판공비와 사업비 등을 횡령해 그중 일부를 국회의원 등에게 후원금 명목으로 건넸다는 ‘국회 로비 파문’을 일으켜 2007년 4월 30일 사퇴했다. 2009년 1월 15일 대법원은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장 전 회장에게 징역 1년 2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의료계의 도덕성 회복’을 주창하며 35대 회장에 당선된 주수호 회장은 잔여 임기 동안 상임이사회 결과 공개 등 열린 집행부를 추구했지만, 36대 회장 선거에서 경만호 현 회장에게 자리를 내줬다.

    2000년대 들어 의협은 사이버연구교육을 실시하고, 국제의료봉사와 세계의사회 총회를 개최하는 등 시대의 흐름에 부응했지만, 내부적으로 강온파와 보수·진보 간 갈등, 무책임한 폭로 등으로 ‘집안싸움’을 연출하면서 ‘그들만의 협회’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말 많고 탈 많은 ‘의협 100주년사’ 발간

    친일 논란… 과대평가… 의료대란… “어렵다 어려워”


    조선의학협회가 모태… 대한민국 최강의 이익단체

    의협 100주년사 편찬위원회 한광수 위원장(가운데)과 전·현직 의협신문 편직국장 등이 100주년사 내용을 점검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100주년사 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 한광수 위원장은 “요즘 연산군 때 ‘성종실록’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어 참수된 김일손의 마음이 이해된다”고 말했다. 2008년 11월 15일 의협 창립 100주년에 맞춰 편찬 예정이던 ‘의협 100주년사’가 아직 출간되지 않은 이유를 물었을 때다. 의협사(史)는 논문이나 각종 교재에 자주 인용되는 만큼 관심이 높다.

    “100년사 초안을 보여주니 자신의 전문 분야를 소홀하게 다뤘다거나 의약분업투쟁 때 참가한 자기 이름이 빠졌다는 이들이 있었다. 의협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해 따지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내가 ‘급할 거 없으니 가급적 많은 목소리를 담아 정확하게 기록하자’고 해 지금까지 편찬 작업을 하고 있다.”

    의협은 ‘의협 85년사’ 발간 이후 15년간의 역사를 추가로 기록하고 의료계 역사 사진과 연대표, 부록 등을 수록해 명실상부한 의료역사서를 낼 계획이었다. 편찬을 위해 한 위원장과 연대 여인석 교수(의사학과), 서울대 김옥주 교수(의사학과) 등이 2006년부터 필진 섭외와 자료 수집, 원고 집필을 시작했다. 원래는 의협 창립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발간기념회도 함께 열 계획이었지만, 2010년으로 발간일을 늦췄다. 이유는 앞서 밝힌 대로 회원들의 요구가 제각각인 데다, 의협 뿌리인 의사연구회의 항일활동에 대한 논란, 2000년 의권쟁취투쟁위원회(이하 의쟁투) 기록의 객관성 등이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의협 ‘100주년사’(가제본)를 입수해 확인한 결과, 100주년사는 의사연구회가 “일본인 의사들이 조직한 ‘계림의학회’에 대항하고, 일제의 침략정책에 맞서 항일구국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항일결사 조직체로 발족됐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단체가 어떤 형태로 항일구국 독립운동을 전개했는지에 대한 서술은 빠져 있다. 오히려 의사연구회와 이후 한성의사회 집행부에 대해 친일 논란이 일고 있다.

    “유병필은 친일단체에서 활동했고, 안상호는 1911년 1월 고종이 뇌출혈로 쓰러질 당시 당직의사로 고종을 진료했다. 일본인의 사주로 고중에게 독약을 투여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김익남에 대한 친일 논란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한 규명 없이 의사연구회를 독립운동 결사체로 규정한 것은 무리가 있다. 이는 (이미 발간된) 85년사 자료를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미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독립운동 결사체라고) 강하게 요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싣는 부분도 있다.”

    집필에 관여한 한 의사학자의 말이다. 의협사에서 항일활동을 했다고 언급한 인물에 대해선 학문적 연구가 필요하며, 일제강점기 당시 의사들의 활동상을 독립운동과 결부시킨 것은 무리라고 지적한다.

    의협 관계자는 “여느 회사의 역사(사사)와 달리 의협사는 국민 관심이 높은 만큼 명암을 그대로 밝혀 후세가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고 말했다.

    현대사에서 논란이 많은 부분은 의약분업 시행을 앞두고 1999년 말 시작된 의쟁투의 활약상. ‘의료대란’으로 불리는 당시 기록은 사실 위주의 기전체 형식으로 쓰였다. 당시 의쟁투 집행부 희생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김재정 회장과 한광수 서울시의사 회장을 포함한 집행부의 법원 판결 형량이 담겨 있다. 또 다른 의협 관계자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한다.

    “2000년 초 4만여 의사 회원이 서울 여의도에 모여 의약분업정책 반대를 주장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 거기에 대한 기록은 사실 나열이 전부다. 의미와 한계에 대한 평가도 없다. 당시 수많은 의협 회원들이 탄압을 받았는데 김재정, 한광수 회장과 일부 집행위원에 대한 기록밖에 없다. 편찬위가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에 대해 한 위원장은 “당시 의쟁투는 성공한 투쟁이 아니고, 흥분할 사안도 아니다. 겸손하게 기록해야 한다. 내용이 빈약하다고 흥분하는 사람들은 당시 ‘의쟁투 과실’을 이미 따먹은 이들이다. 나는 감옥에 갔다 왔지만 과실을 따먹지 않았다. 법원 형량 부분은 내가 넣자고 했다. 100년간의 공과를 특정인의 눈으로 재단할 수 없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따지고 보면 의료대란 당시 의협은 국민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잊은 집단 이기주의 단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편찬위 천만섭 간사(‘닥터스 뉴스’ 편집국장)의 고민도 비슷하다.

    “‘누구 이름은 넣었는데 왜 내 이름을 빼느냐’고 항의할 때는 난처하다. 당시 (검거를 피해) 숨어 지냈다고 해도 확인을 해봐야 한다. 이 밖에 건강보험 문제나 의과대 신증설 부분이 많이 기록됐다고 하는데, 이 역시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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